nykca

  해외조선족문단
  중국조선족문단
  今週文壇之秀 • 今日点擊之最
  소설연재

  [글 쓴이: 류영애, 중국 청...[67]
  일상공유: 바람 바람 바람
  뉴욕 크리스마스 진수를 체험...[3]
  인생은 아름다워라[58]

  [리순옥 시선] 어머니 (외) ...[31]
  은퇴시 이 10가지는 고민...[1]
  [실시간-뉴욕속보] 뉴욕 조...[2]
  "디아스포라문학 공동발전 기...[17]
  7월12일주일예배설교"다림줄...

  [이미옥 문학평론] 봉녀를 ...[114]
  서국화 수필 [아줌마는 즐거...[43]
  ◆저의 노래로 봄인사 올립니...[13]
  그대를 내 인생의 라이벌로 ...[19]
  [김성희,서울대비교문학박사]...[93]

  노신, 친일 문인일 가능성 ...[61]
  ★박홍매 미술작품 전시회★[18]
  "유럽의 신세계적 건축미 연...[21]
  남설화 - 나 설화거든[72]
  리경란,회사원,일본 동경[74]

  [글 쓴이: 김분자, 일본 센...[34]
  내 사랑 [詩/서지월][11]
  (144) '불나비' 제2부[6]
  만주기생 (滿洲妓女)[12]
  청설의 산문문학[42]
  김일성 평전 하권(집필 진행...[2]
  이별이라니?[2]

Home > 今週文壇之秀 • 今日点擊之最


 
김일성 평전 하권(집필 진행중) 발췌 - 일본군 쿠로사키유격대"黑崎游擊隊"는 어떤 부대이며,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그의 조직인원 구성과 그들의 활동상은 어떠했는가?
피안   Hit : 2088 , Vote : 67        [2018/05/08]




[편집자의 말] 항일연군 제1로군의 역사에서 1936년 여름부터 양정우의 1군을 끈질기게 추격하고 다녔던 "黑崎游擊隊“라고 부르는, 약 160여명 규모의  일본군 특수부대가 나옵니다. 이 무렵 양정우의 1군은 많은 전투를 진행하면서 만주군과 일본군 토벌대들을 소멸하였으나 유독 이 특수부대에게만은 계속 쫓겨다니기만 했습니다. 쫓겨다니면서도 몇번은 전투를 시도했지만 번마다 패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특수부대는 항일연군의 전법에 굉장하게 익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왜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일가요? 이 일본군 특수부대에는 당시 양정우의 신변에서 귀순하였던 최고위급의 항일연군 출신 간부들이 포진하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높은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1군 참모장 겸 정치부 주임이었던 안광훈이었고, 다음은 1군 1사 사장이었던 정빈이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사는 일찍 이홍광의 "개잡이대"를 모체로 하는 부대였습니다. 그 외에도 또 1군 정치부 주임 겸 1로군 군수처장이었던 호국신과 남만성위원회 위원 겸 유하중심현위원회 서기였던 풍검영(본명은 최봉관, 조선인)도 이때 모두 귀순하고 이 일본군의 특수부대에 참가하여 있었습니다.  항일연군의 역사상 "黑崎游擊隊“로 소문났던 이 부대는 구경 어떤 부대였으며, 어떻게 조직된 부대였으며, 그의 조직구성과 인원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었던지에 대하여, 현재 집필중인 유순호작가의 "김일성 평전"(하권)  제8권"에서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일부분을 잠깐만 소개하여 드립니다 ......"


[생략]


풍검영은 본명이 최봉관(崔鳳官)이며 안광훈과 오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일찍 조선민족혁명당시절부터 함께 활동해왔었던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전광의 연락을 받고 남만지방으로 나온 뒤에 두 사람은 모두 반석중심현위원회에서 주요 직책을 담당하였다. 한때 풍검영은 공청단(共靑團) 반석중심휘원회 서기가 되었고 오히려 안광훈보다도 먼저 현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2명의 여성 공청단간부와 동시에 연애를 하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처분받고 하마터면 출당까지 당할번 하였다.
그러다가 안광훈이 선전부장으로 있을 때 재차 선전간사로 재 기용되었다.
당시 안광훈의 여비서였던 구은혜(具恩惠)는 해룡현 산성진(海龍縣山城鎭) 여자였다. 안광훈의 소개로 풍검영과 결혼하였고 후에 유하중심현위원회로 조동하면서 구은혜도 함께 남편을 따라 유하현 고산자진으로 옮겨왔다.
구은혜는 유하중심현위원회 부녀부장직을 맡고있었다.
풍검영과 구은혜는 1936년 1월에 결혼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백날이 되었을 때 부부가 함께 구은혜의 친정이 있는 산성진으로 놀러갔다. 구은혜의 부모도 만나 뵙고 또 아이 백날사진도 찍으러 함께 사진관에도 다녀오고 하였다. 그런데 산성진에서 풍검영은 생각밖의 웬 낯모를 사내와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 봉관이, 나를 모르겠나?”
그 사내는 온 몸이 상처투성인데다가 한쪽 눈에는 붕대까지 칭칭 감고있었다.
그 붕대바깥으로는 피까지 새어나왔다. 풍검영이 더욱 놀란 것은 그 사내가 아무도 모르는 풍검영의 조선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뉘시오? 난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인데 어떻게 내 이름까지 다 알고 계신지오?”
그 사내는 풍검영의 손을 잡아끌고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제길할, 이래도 못 알아보겠나?”
그 사내는 얼굴에 감고있던 붕대를 풀어보였다.
그런데 붕대를 풀자 온통 피고름으로 범벅이되어 있는 눈이 드러났다. 얼핏 보기에도 눈은 이미 실명된 것이 틀림없었다. 풍검영은 한참이나 그 사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조금 낯익기는 한 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구려.”
“에휴, 내 몰골이 자네까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흉측해졌을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겠구만.”
하고 그 사내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봉관이, 내가 응택(應澤, 卽廉應澤)이오.” [주석 284]



[주석 284]


염응택(廉應澤)은 2015년 한국에서 제작되었던 영화 “암살”(暗殺)에서 밀정으로 나오고 있는 염석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염응택은 본명이며 그는 주로 염동진(廉東振)이라는 별명을 사용하였다. 1902년에 한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유년기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34년 2월 25일에 낙양군관학교 조선반(또는 한인반)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에 졸업하였다는 기록은 중국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영화 “암살”속의 내용과는 좀 달리 그가 정식으로 일본군의 밀정이 되었던 것은 1936년 2월, 오늘의 중국 길림성 매하구시 해룡현 산성진에서 관동군 헌병 제3연대에 체포되면서부터였다. 이때 고문을 당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뻗혔으나 고문이 어찌나 혹독하였던지 한쪽 눈까지 실명되었을 지경이었다. 이후 염응택은 관동군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중국 중앙당안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염응택과 관련한 비밀자료들이 최근에야 일부 공개되었는데, 관동군에서는 염응택에게 “만주지방의 공산게릴라부대들을 소탕하는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고, 염응택도 공산게릴라부대속에 자기와 인연이 있는 최봉관(풍검영), 안창훈(안광훈), 오성륜(전광) 등 조선인 고위간부들을 귀순시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실제로 염응택은 이 약속을 실현하였고 1940년 경에 관동군에서 풀려난 뒤 평양으로 돌아왔다. 1938년 2, 3월 경에 염응택은 항일연군 대원으로 위장하고 중공당 남만성위원회 기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환인, 관전근거지에 잠복하였으며 일본군 쿠로사키 사다아키(黑崎貞明)중위가 인솔하였던 동변도 토벌사령부 유격대와 내응 외합(內應外合)하여 당시 항일연군 1군 정치부 주임 겸 참모장이었던 안광훈을 체포하는데 성공하였다. 1945년 이후 한동안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염응택은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월남하여 서울의 낙원동에 거주하면서 “백의사”(白衣社)를 조직하고 단원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이 조직은 중국의 국민당 “군통” 조직의 전신이었던 “남의사”(襤衣社)를 흉내냈다. 단원들은 서로 잘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결사형태로 구성하였고 맹렬한 반공주의 활동을 진행했다. 한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이북의 김일성 등 요인 암살을 시도하였고, 또 단원들을 경찰계, 국방 경비대, 노동계 등에도 들여보냈다. 당시 김일성을 암살하러 평양으로 잠복하였던 이 단원들은 김일성과 최용건의 숙소를 헷갈려 최용건의 숙소에다가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몇 명만 제외하고 모두 흩어졌다.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밀정”답게 말년의 자기 인생을 그 누구도 알수 없게끔 만들어놓고 조용하게 사라져버렸다. 당시 염응택과 접촉했던 적이 있는 미국의 조지 실리 육군소령은 그에 대하여 “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이란 평을 내렸고, “혹은 일반적으로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맹인장군”으로 불렸던 것은 그가 1936년에 일본군에게 붙잡혔을 때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눈이 실명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실리 소령이 미국 중앙정보국에 바친 보고서서는 염응택을 가리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나 미국인과 인터뷰할 때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의 소유자”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외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염동진을 두고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라며 “하루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만 생각한 냉혈인간”이라고 평가했다. 해방정국 혼돈 속에 염동진은 홀연히 사라졌지만, 그의 백색테러는 백주의 호열자처럼 퍼져나갔다고 덧붙이고 있다…….(著者 注)


하고 자기의 이름을 댔다. 그 바람에 풍검영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응택이라니? 염응택, 그러면 염동진(廉東振, 염응택의 별명), 그 염형이란말이오?”
“어이쿠, 이제야 알아보는군.”
하고 염응택이 머리를 끄떡이자 풍검영은,
“아니, 형은 그때 낙양으로 가지않았었소? 내가 남만에 나온뒤에도 형의 소식은 조금 얻어들었소. 낙양군관학교 조선반을 졸업하고 남경인지 상해인지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다고들 하던데 어떻게 이 모양이 되어가지고 여기서 만날 수가 있단말이오?”
하며 반가워하였다.
“일구난설일세.”
염응택은 그동안 자기가 겪은 일들을 두루두루 털어놓았다.
낙양군관학교 조선반을 졸업한 뒤에도 다시 또 남경으로 돌아갔으나 애시당초 성향이 다른 인사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었던 탓에 김원봉파와 신익희파, 김규식파, 조소앙파, 최동오파 등 10여갈래의 파벌로 나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홧김에 다 팽개쳐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주에 들렸는데 해룡의 산성진 역(驛)에서 기차를 바꿔타다가 그만 일본헌병대에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얻어맞았소?”
“아무리 뚜드려봐야 나한테서 뭐가 나올게 있겠소? 헌병대 놈들은 기차역에서 항일연군을 수색하고 있던 중인데, 재수가 없으려니 그 헌병대놈들 가운데 아즈마(五妻)라고 부르는 준위놈이 글쎄 남경에서 나를 보았던 적이 있다고 딱 잡아떼지않겠소. 이놈한테 면바로 잡혀서 헌병대까지 끌려가 반죽엄이 되도록 얻어맞고 놓여나왔소. 나중에 헌병대장이란 자의 앞에까지 끌려갔는데 ‘내가 항일연군이 아닌가?’고 묻더구만. 그래서 아니라고 했고, 그 아즈마란 자도 내가 ‘남경과 상해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항일연군은 아닌 것 같다.’고 증명해주어서 겨우 놓여나오기는 했소만, 너무 얻어맞아서 몸이 이 모양이 된데다가 노자까지 떨어져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중이오.”
이에 풍검영은 염응택을 데리고 고산자진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만주에 남아 함께 일해보자고 권고하였으나,
“일단은 고향에 한번은 갔다와야겠네. 나중에 다시 봅세.”
하고 염응택은 풍검영에게서 노자를 얻어가지고는 산성진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아이의 백날사진을 찾으러 사진관으로 갔던 풍검영의 아내 구은혜가 그만 사진관주인의 밀고로 아이와 함께 산성진 경찰대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들이 백날밖에 안 된 어린 아기를 강보채로 빼앗아놓고 위협하는 바람에 구은혜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울고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염응택이 불쑥 나타났다.
“제수, 아이는 내가 꼭 되찾아드리겠으니 걱정마오.”
염응택은 한 일본군인을 데리고 산성진 경찰서로 찾아왔다.
이 일본군인이 바로 산성진 헌병대 아즈마준위(五妻准尉)였다. 일설에는 아즈마준위도 역시 조선인이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아즈마준위는 직접 경찰서의 책임자에게 구은혜를 데려가겠다고 말하였다. 얼마 뒤에 인계수속을 밟고나서 산성진 경찰서에서는 구은혜의 아이를 돌려주었다. 구은혜는 그길로 산성진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제수, 내가 헌병대에서 얻어맞고 눈까지 하나가 실명된 것을 보지못했소?”
구은혜는 새파랗게 질리며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너무 겁 먹지는 마오. 그냥 헌병대에서 요구하는대로 다 들어주기만 하면 이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해줄 것이오. 그러나 반항하면 안 되오. 어른들은 좀 뻗힌다치고 백날밖에 안 된 이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하겠소?”
염응택의 말을 듣고있던 구은혜는 알겠다는 듯이 연신 머리를 끄떡이고 말았다.
며칠 뒤에는 구은혜가 직접 나서서 풍검영을 설복하였다.
“여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귀순하지 않으면 아이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해요. 당신도 만주국에 귀순하고 우리 함께 아이나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아갑시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던 풍검영도 늙으막에 겨우 본 어린 아들을 잃을 수가 없었다.
결과 귀순하고 말았다. 풍검영의 귀순은 금방 만주국 군정부와 동변도 토벌사령부에 보고되어 올라갔다.
“이 안건은 저희 통화성 경무청에 넘겨주십시오.”
키시타니 류이치로(岸谷隆一郞)는 부임한지 불과 일주일도 되나마나했다. 동변도 토벌사령부 회의에 참가하러 왔다가 이 소식을 알게된 키시타니는 직접 요청하고 나섰다.
“저희 통화성 경무청 산하 경무과에서 올려온 보고가운데 중공당 통화중심현위원회와 관련한 자료가 들어있습니다. 이 자료속에는 통화중심현위원회가 1935년 7월에 파괴된 뒤로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대신 원래의 유하현위원회가 최근에 유하중심현위원회로 확대되었으며, 현위원회 서기가 바로 풍검영입니다. 이 자는 또한 남만성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기시타니 경무청장은 동변도 토벌사령부의 허락을 받은 뒤에 직접 산성진으로 달려왔다.
당시 산성진 헌병대는 따로 건물이 없어 남만주 철도회사에서 제공하는 산성진 기차역의 한 2층짜리 건물을 임시로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심해철로(沈海鐵路, 卽奉海鐵路)의 시발역이기도 하였던 산성진 기차역에는 전문적으로 남만주철도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던 만주독립수비대(滿州獨立守備隊) 산하의 한 개 보병중대 병력이 항상 상주하고 있었다.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산성진에서 이 보병중대의 한 젊은 중대장을 소개받게 된다.
나이는 20대 초 중반이었고 군사계급은 중위였다.
“여기 산성진을 수비하고 있는 만주독립보병 제6대대 산하 2중대 중대장이오. 이름은 쿠로사키 사다아키(黑崎貞明)인데 어렸을 때 토쿠시카시(德島市)에서 장차 현지사(県知事)가 되리라는 꿈을 키워왔던 젊은 수재였다오. 고등학교 때는 문과 장원도 했었고 그 학교에 와있던 군부 배속장교(配屬将校)의 충고로 해병과 육사를 동시에 시험 보았는데 글쎄 두 곳에서 모두 합격통지가 왔다지 않겠소. 그런데 1고(一高, 卽一高等学校)로부터는 합격통지를 받지 못했기에 일단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야 사관학교 학생집회소에서 발표된 관립학교 합격발표통지서를 보게되었더라오. 거기에는 ‘제일고등학교 문과 을류 쿠로사키 사다아키’(第一高等學校文科乙類・黑崎貞明) 라고 적혀있었던게요. 아, 참으로 지사가 꿈이었던 이 친구 쿠로사키로 말하면 정말로 제일 고등학교로의 입학지망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육군사관학교는 기본적으로 퇴교를 허락하지 않았지오. 이렇게 군인이 되어 지금 만주땅에까지 오게 된 아까운 젊은이오.”
산성진 헌병대장은 일본 국내에 있을 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사람이었다.
그 역시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전공했고 참군하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장차 시인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 때면 헌병이라는 신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무척 센치멘탈한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키시타니는 헌병대장의 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마당에서 부하들과 농구를 치고있는 쿠로사키중위를 한참 눈여겨 보았다.
“얼굴을 보니 겨우 스물댓밖에 안되어 보이는데 어떻게 벌써 중대장이 다 되었단말이오? 중대장이 되자면 최소한 상위나 소좌는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오?”
산성진 헌병대장에게서 쿠로사키중대장을 소개받은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어느 백작댁의 도령인가 보구만? 계집아이처럼 너무 이쁘게 생긴 얼굴이로구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산성진 헌병대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말도마오. 애숭이처럼 보여도 황도파(皇道派)라오.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장군을 추종하는 그 젊은이들속의 한 사람이었는데 ‘2ᐧ26’때 잘못 걸려들었다가 하마터면 사형까지 당할번 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무죄로 판결받고 만주로 나온 인물이오. 난 이 친구가 언젠가는 틀림없이 크게 될 인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기시타니 경무청장은 반신반의했다.
“계급은 중위인데 직급은 중대장이라, 무슨 괄목할만한 군공이라도 세웠나보오?”
“계급이야 글쎄 군령이 짜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만주에 나온지 불과 1년도 되나마나 한 사이에 많은 전공을 세웠다오. 얼마전에는 또 흥경에서 심해철도를 전복하려고 들었던 항일연군을 공격하여 일거에 40여명이나 사살하고 크게 승리했다오. 그리하여 중대장으로 진급한지가 아직 얼마 안되었지만, 저 말쑥한 생김생이와 예절바른 인사법을 보오. 거기다가 또 부하들은 어찌나 사랑하는지 일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없소. 내가 더욱 감탄하고 있는 것은, 중대장이 되었는데도 소대장 때와 꼭 같이 틀거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오. 식사도 언제나 꼭 사병들과 함께 하고 그러더구만. 내게 만약 딸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저 친구를 사위로 삼고 싶을 지경이오.”
산성진 헌병대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쿠로사키중위를 칭찬했다.
이렇게되어 기시타니 경무청장은 통화로 돌아온 뒤에 즉시 동변도 토벌사령부에 보고하고 쿠로사키중위의 만주독립보병수비대 제6대대 산하 2중대를 통째로 차출하여 일명 “쿠로사키유격대”(黑崎遊擊隊)로 편성하고 통화성 경찰대대와 함께 공동으로 토벌작전을 진행하였다. 키시타니 경무청장이 직접 이 유격대의 지도관을 맡았다.
그리고 산성진 헌병대에서 또 차출한 아즈마준위(五妻准尉)와 헌병반장(憲兵曺長) 나카지마 유지로(長島玉次郞)도 모두 이 쿠로사키 유격대로 조동시켰다. 여기서 나카지마 유지로는 원래 고쿠류카이(黑龍會) 출신으로 만주에서만 20여년 넘게 살았던 한마디로 “만주바닥쇠”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이었다. 어찌나 지독하였던지 전해지고 있는 소문에 의하면 사람고기까지 먹었다고 한다.  
염응택과 풍검영, 구은혜 등은 모두 이 나카지마에게서 취조받았던 것이다.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일단 풍검영과 구은혜 부부를 놓아주고 고산자진 내에 좋은 집을 한 채 마련하여 선물하였다. 이 집에다가 구은혜 모자를 안치한 뒤에 풍검영만은 다시 팔리초밀영으로 들어가 양정우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 편지를 가지고 갔던 연락원이 돌아와서,
“양사령은 만나뵙지 못하였고 안 참모장을 만났는데, 이 이 편지를 풍서기께 전해주라고 합디다. 성위원회 기관까지도 모두 1군 군부와 함께 서쪽으로 나갔고, 근거지에는 일부 거동이 불편한 부상병들과 군부 후방기관만 남았는데, 그들도 곧 로령산을 떠나게 된다고 합디다. 토벌대놈들이 근거지 위치를 눈치챈 모양이던데, 제가 그럼 차라리 우리 팔리초밀영으로 와서 계시라고 했더니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합디다.”
연락원이 하는 말을 듣고 풍검영은 금방 판단했다.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단 말이지? 그럼 틀림없이 우리한테로 올 것이다.”
풍검영이 짐작했던대로 며칠 뒤에 군수처장 호국신이 먼저 부상병들을 데리고 팔리초밀영에 도착하였다. 풍검영이 밤에 집에 돌아와서 구은혜한테 말하였다.
“호국신은 이미 독안에 든 쥐요. 안광훈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함께 오지않고 한 이틀쯤 뒤에 떨어져서 오게될 것이라고 하더구만. 먼저 호국신을 들여보내고 별 다른 이상 정황이 없는가 관찰해보려는 것이 틀림없소. 안광훈은 군 참모장이라, 만약 이 사람만 붙잡아도 우리는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오. 나중에 호국신과 안광훈을 통하여 양사령까지도 붙잡게될 것인데, 우리가 그런 것까지는 상관할바가 아니지만, 안광훈만은 꼭 붙잡아야 하오. 당신한테 좀 더 좋은 무슨 방법이 없겠소?”
“제가 직접 부녀부의 간부들을 데리고 밀영으로 올라가 부상병들을 간호해드릴게요. 그러면 호국신은 백프로 우리를 믿고 안광훈에게 연락할거예요.”
구은혜가 이렇게 방법을 대자 풍검영은 즉시 키시타니 경무청장에게 연락하였다.
유하현 경찰대대에서는 구은혜에 대한 연금을 풀고 집주변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사복경찰들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그날로부터 구은혜는 등에 아이를 업은채로 부녀부의 여성간부 10여명을 데리고 직접 밀영으로 들어와 부상병들을 간호하였다.
그제서야 안광훈은 호국신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천천히 밀영으로 들어왔다.
그날 저녁에 풍검영, 구은혜부부는 고산자진에 따로 살림을 차려놓고 있는데 안광훈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이에 완전히 의심을 푼 안광훈은 호국신 등 부상병들은 모두 밀영에 둔채로 혼자 경위원 하나만 데리고 고산자진으로 따라내려갔다.
거리에 들어섰을 때 풍검영이 안광훈과 구은혜에게 권하였다.
“내가 잠깐 술과 고기를 좀 사가지고 갈테니 당신이 안참모장을 모시고 먼저 집에 가있소.”
안광훈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의심도 하지않았다.
그런데 집이 가까워오고 있을 때 구은혜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안광훈에게 소리쳤다.
“광훈오빠, 빨리 도망치세요. 미안해요. 우리 부부는 이미 귀순했어요.”
“아이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 둘 한테 이렇게 당하는구나.”
안광훈이 비명을 지르는데 구은혜가,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치세요. 봉관(鳳官, 卽崔鳳官, 풍검영의 본명)오빠가 경찰들을 데리고 오자면 아직도 시간이 좀 걸릴거예요.”
하면서 안광훈의 등을 떠밀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안광훈은 구은혜가 등을 떠미는 것을 매달려 붙잡으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바로 옆구리에서 권총을 뽑아들어 한방 갈기고는 허둥지둥 내뛰었다. 아내가 총상을 입은 것을 본 풍검영은 악에 받쳐 경찰대대와 함께 밤새도록 안광훈의 뒤를 쫓았으나 끝내 붙잡지 못하고말았다. 안광훈을 엄호하던 경위원만 사살하고 돌아와 보니 구은혜도 이미 숨이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보, 내가 로안(老安, 卽安光勳)을 꼭 붙잡아서 복수하겠소.”
하고 벼르는 풍검영에게 구은혜가 겨우 한마디 했다.
“광훈오빠는 우리 두 사람 입당소개인이었어요. 우리가 그분께 미안하잖아요.”
구은혜가 죽은 뒤 풍검영은 키시타니 경무청장을 도와 호국신까지도 귀순하게 만들었다.
그때 호국신은 팔리초밀영에서 총소리를 듣고 부상병들은 모조리 내버려둔채로 혼자 탈출하여 안광훈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오늘의 요령성 본계만족자치현(本溪满族自治縣) 경내의 동영방향(東營坊鄕) 양호구촌(洋湖溝村)까지 허둥지둥 달려와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양호구촌에서 멀지않은 동남쪽으로 약 10여리 떨어진 곳의 산골짜기에 1군 1사 산하 제4퇀이 주둔하고 있었다.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풍검영을 길잡이로 내세워가지고 통화에서 이곳까지 쫓아왔다.
마침 환인, 관전근거지를 소탕하고 있었던 만주군 동국화여단의 군사고문 고마이중좌(駒井中佐)와 만나 함께 4퇀이 주둔하고 있었던 양호구밀영(洋湖沟密營, 又稱倒木沟密營)을 습격하였다. 4퇀(연대) 퇀장(연대장) 수상생(隋相生, 又稱隋祥泰)이 호국신을 엄호하다가 사망했고, 여기서도 또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던 호국신은 근처의 또 다른 흑갱대지(黑坑大地)라고 부르는 비밀밀영으로 이동했으나 다리에 총상을 당하여 더는 걸을 수 없게되었다.
결국 경위원이 더는 참지못하고 호국신을 포박한뒤 끌고가서 투항하였다.
호국신은 즉시 통화현 병원으로 호송되어 병 치료를 받았다.
건강이 회복된후 모두 통화성 경무청 산하 경찰토벌대에 배치되었고 호국신과 풍검영도 역시 이 경찰토벌대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이번에 안광훈을 붙잡기 위하여 호국신을 이용하였다.
“자네 안광훈과 사이가 어떠한가?”
“제가 안광훈의 추천으로 군수처장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자네의 임무는 안광훈이 몸을 숨기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내는 것이네.”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호국신에게 상금과 훈장 뿐만 아니라 경무청에 취직까지 시켜주마고 약속했다. 이때 팔리초밀영에서 포로되었던 부상병 30여명이 처음에는 경찰토벌대에 배치되었으나, 후에 또 포로들이 늘어나면서 키시타니는 전문적으로 그들만을 따로 묶어내와 대대규모로 확충하게 되면 호국신에게 대대장까지 시켜주겠다고 유혹했다.
“제가 안참모장이 귀순할 수 있도록 설복도 해보겠습니다.”
호국신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크게 기뻤다.
“그게 참으로 가능하겠나? 그렇게만 해낸다면 자네는 정말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걸세.”
“네. 가능합니다. 최근에 안참모장은 양사령과 의견이 맞지않아 항상 티격태격하면서 버성겨왔고, 양사령이 또 서쪽으로 나간다고 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 설복하면 안참모장도 반드시 귀순하게 될 것입니다.”
호국신은 어렵지않게 안광훈을 찾아냈다.
왜냐하면 양정우가 서정부대를 데리고 로령산근거지에서 출발한 뒤에 안광훈과 호국신이 원래 이동하려고 했던 곳은 유하현 경내의 팔리초밀영이 아니라 환인, 관전 경내의 옛 근거지였다. 제2차 “서북원정”기간에 총상을 당하고 1사 주력부대였던 3퇀이 해산하는 바람에 겨우 1사 사장 정빈은 사부 직속 보안중대만 데리고 환인, 관전근거지에 계속 남아있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생략]


저자는 이후 남만성위원회 기관의 주요 당직자들과 1군 군부 후방부문 책임자들이 거진 몰살하다시피 하였던 그 유명한 우모오(牛毛烏) 서차(西岔)밀영을 직접 답사하였다. 중국말 발음 그래도 일명 “쯔무타이즈”라고 부르기도 하였던 작목태자(柞木台子) 밀영도 역시 서차밀영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늘의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辽宁省本溪市桓仁满族自治县) 팔리전자진(八里甸子鎭) 경내의 “얼펑댄즈”(二棚甸子) 부근에 있었는데, 그 위치가 굉장하게 은밀하였지만, 결국 다 소용없어진 것은 종당에 가서는 호국신 뿐만 아니라 안광훈과 정빈까지도 모조리 다 일본군에게 귀순하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안광훈에게로 돌아간다.
안광훈은 정빈이 새로운 밀영을 건설하러 나간 뒤에 누구보다도 먼저 중공당 환인현위원회 서기였던 이명산부터 불러들여 부탁했다.
“풍검영이 변절하고 호국신도 체포되었소. 로위가 전광동지와 만나러 장백으로 나갔는데 아마 지금쯤은 로령산으로 돌아오고 있을지 모르오. 양사령이 교도대대를 데리고 이미 청원쪽으로 이동하고 우리도 모두 이곳으로 옮겨온 사실을 모르고 있는 로위가 멋 모르고 로령산으로 들어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단말이오. 더구나 호국신이 아직 놈들한테 넘어가버렸는지 아니면 지금까지도 계속 지조를 지키고 있는지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이 곳 역시 안전하지가 못하오. 그래서 빨리 로위한테로 사람을 보내어 이 정황을 알려드려야 하오.”
이명산은 선뜻이 나섰다.
“누구를 따로 보낼 것 없이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이렇게되어 이명산은 안광훈이 써주는 편지까지 한통 받아가지고 그날로 길을 떠나 화전과 즙안 사이의 로령산기슭에 도착하였다가 여기서 황정해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위증민은 결국 다시 동만강밀영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때는 벌써 9월에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이후 이명산은 위증민의 부탁을 받고 환인, 관전근거지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다른 사람을 파견하여 양정우의 소식을 보내주군 하였지만 대부분 한참 때지난 소식들이었다. 7월 중순 경에 로령산근거지에서 출정한지 얼마 안되었던 양정우의 서정부대는 벌써 흥경현 경내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일본군 마츠바라(松原) 토벌대와 전투가 발생하여 일본군 40여명을 모조리 사살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9월에 마지막으로 한차례 전달되었던 내용에도, 서정부대가 흥경 3구에서 흥경 5구로 이동하여 관전현 마록구 도로경비대를 습격하였고 관전 사평가와 쌍산자 사이에서 경비대를 구원하러 달려오고 있었던 일본군을 태운 자동차 석대를 습격하고 일본군 30여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소식을 전하러 왔던 통신원이 위증민에게 말했다.
“이번에 양사령의 서정부대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도 거의 전부 일본군입니다.”
“보나마나 그래서 서정부대가 아직도 흥경지방에서 더 서쪽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 곳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내가 빨리 도와드려야 겠소.”



위증민은 양정우의 서정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여간 노심초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전광에게로 사람을 보냈으나 갔던 사람이 번마다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전광동지가 지금 조선 국내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통신원의 말을 들은 위증민은 깜짝 놀라 다시 김성주에게로 사람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통신원은 김성주도 만나지 못하였다. 이때 전광과 김성주는 권영벽, 이제순, 박금철 등 중공당 장백현위원회 주요 간부들과 함께 한창 “9월 호소문”이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공작원들에게 한보짐씩 나눠메고 몰래 압록강을 넘어 조선 국내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통신원이 몇 번이나 13도구 밀영으로 전광을 찾아갔으나 번번이 만나지 못하고 다시 신흥동, 초수탄, 도천리 등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던 6사 사부 지방공작대 거점들로 김성주를 찾아다녔지만, 김성주도 역시 만날 수가 없었다.
후에 통신원은 도천리에 들렸다가 여기서 가까스로 김주현과 만났다.
이때가 바로 6사 여성중대 여대원 김수복이 살해당했던 그  “주경동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는데, 신분이 폭로되었던 김주현은 도천리뿐만 아니라 가재수, 신흥촌, 왕가동, 홍산, 반재구 등지의 광복회 조직원들 집에서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숨어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조직들도 모두 육속 파괴되고 있던 중이었다. “보천보 전투”에 이어서 “간삼봉 전투”가 발생한지 불과 2개월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혜산경찰서의 고등계 경찰들은 총출동하다시피 압록강을 넘어와 장백현 경내에서 광복회 조직을 색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장백현 경찰대대는 물론 만주군까지 동원되어 김성주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바로 “혜산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줄도 모르고 전광과 김일성은 서로 자기가 조선으로 들어갔다 오겠노라고 옥신각신했다. 김성주는 회고록에서 전광의 이름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채로 자신이 직접 정치공작조를 데리고 압록강을 넘어 신흥, 풍산까지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직접 조선 국내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군정간부들이 모두 나서서 간청하다시피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뒤로부터 “나”는 “우리”로 바뀐다. 만약 누가 따지고 든다면 “나”의 파견을 받고 국내로 들어갔던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신흥을 거쳐 풍산지구에까지 “9월 호소문”이 전해졌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가지고 직접 국내로 들어갔던 광복회 최고 책임자는 다른 사람 아닌 전광이었다.
전광의 경호임무를 담당했던 김주현은 직접 소분대를 데리고 압록강을 건넌 뒤에는 부전령산줄기 남쪽기슭에 위치한 신흥지구의 울창한 수림속까지 안내하였다. 여기서 박달이 마중을 나오자 전광은 박달과 함께 갑산군 운흥면 철도공사장의 노동자들과 만나러 떠나고 김주현은 무산군 백무선 철도공사장으로 떠났는데, 이때 철도공사장에서 체포되었던 한 광복회 회원이 형사한테 다음과 같이 자백했다.
“만주에서 광복회 책임자가 직접 갑산군에 나왔는데 우리를 만나준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책임자가 박달이냐, 아니면 김일성이냐? 누가 직접 왔다고 하더냐?”
함경남도 경찰부에서는 이 회원의 연줄을 타고 혜산에서 또 다른 회원 3명을 체포하였는데, 이 3명가운데 박달이 직접 발전시켰던 간부 김철억이 들어있다. 김철억은 그의 사촌형 김창영과 함께 얼마전에 장백현으로 들어와 권영벽을 만난 뒤에, 권영벽으로부터 “9월 호소문” 한 배낭을 받아가지고 다시 몰래 혜산으로 잠복했던 사람이었다.
위증민이 급히 전광을 찾고있다는 연락을 받은 권영벽은 곁에 당장 대신 보낼 사람이 없어 자기가 직접 옥양목바지, 저고리를 새로 지어입고는 부랴부랴 길을 떠났으나, 그만 강을 건느다가 도강증을 검사하는 형사들한테 붙잡히고 말았다. 평소 권영벽은 바로 옥양목바지 저고리차림으로 찍어둔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검문에 걸리면 능청스럽게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이오.”하고 둘러대군 하였는데, 이날은 형사의 곁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같이 있다가 권영벽을 알아보고는 형사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 사람이 바로 장백현의 광복회 우두머리입니다.”
‘낯익은 저 사람은 언젠가 박달의 소개신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던 적이 있는 그 김창영이란 자가 아닌가? 저 자가 원래는 밀정이었단 말인가?’
권영벽은 후닥닥 형사를 밀치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형사들이 강변으로 따라내려오면서 연신 권총을 쏘았지만 명중하지 못하자, 그 길로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으로 들어왔다. 그때 이미 장백현 신흥촌주변에 와서 잠복하고 있었던 혜산경찰서 파견대는 고등주임 최연(崔燕, 卽高山淸只)의 인솔하에 한창 상강쪽으로 피신하였던 이제순을 뒤를 쫓고있던 중이었다. 최연이 남겨놓은 사복 형사 둘이 밤에 이제순의 집 닭장 뒤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었는데, 그런줄도 모르고 이제순의 아내 최채련은 밤중에 느닷없이 남편을 찾아온 권영벽을 보고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낮에 혜산에서 나온 형사들이 여기까지 왔댔어요.”
“그럼 동석(東石, 卽李東石, 이제순의 본명)는 어떻게 됐소?”
“이틀전에 낌새가 좋지않다면서 상강(上岡, 卽長白縣上崗區)에 있는 아주버님 댁(이제순의 형 李孝淳이 상강에 살고있었다)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이라고 무사하겠어요? 오늘쯤은 소식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계속 연락이 없어요.”
이제순의 아내 최채련이 하는 말을 듣고 권영벽은,
“시간이 없으니 묵은 밥이라도 있으면 좀 주오. 길에서 먹겠소.”
하고 당장 떠나려고 하였다.
이에 최채련은 급히 주먹밥을 만들어 삶은 감자 몇 개와 함께 보짐속에 넣어주면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달걀이 있나 보고올게요.”
하고 닭장으로 달려가 닭광주리속에 손을 밀어넣어보았다.
길에서 생달걀이라도 먹으라고 보짐속에 넣어주려고 하였는데, 달걀은 없고 대신 차가운 권총이 손에 섬뜩하게 부딪쳐왔다. 잠복하고 있던 형사 둘은 원래 이제순의 아내를 놀래우지 않고 여기 찾아왔던 권영벽이 다시 또 어디로 가는지를 미행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최채련이가 닭장인데로 오는 바람에 발각되고 말았다.
형사가 급히 최채련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에구머니나!”
하는 새된 비명소리가 이미 울린뒤였다. 거기다가 놀란 닭들이 또 닭장속에서 푸드덕거리고 울어대는 바람에 권영벽은 후닥닥 울바자를 박차고 마을밖으로 내달았다. 형사 둘이 그 뒤를 쫓았다. 상강구까지 뛰어갔던 권영벽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못한데다가 몸에 가지고 있었던 권총도 탄알이 떨어져 반격할 수가 없었다.
지친 나머지 길바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 숲속에 숨어있었던 이제순의 형 이효순은 권영벽이 끌려가는 것을 눈앞에서 빤히 바라보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해방후 북한 당내에서 갑산파의 대표인물이 되었던 이효순, 박금철 등이 제거될 때에, 이효순에게는 권영벽을 구하려고 뛰쳐나가지 않았던 것도 죄목중의 하나가 되었다. 최연 등 혜산에서 나왔던 형사들이 권영벽을 마차에 싣고 갈 때 구경하러 나왔던 마을 사람들속에서 이효순을 발견한 권영벽은 연신 눈짓을 보냈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지시였다는 것이다.
권영벽을 실은 마차가 신홍촌에 들렸는데, 형사들이 그 동네에서 저녁을 먹고있을 때 이삼덕이라고 부르는 이제순의 친구가 형사들의 동의를 구하고 권영벽에게 물을 가져다주면서 몰래 연락을 취했다. 권영벽은 이삼덕에게 김주현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서  
“큰 집에서 갑산으로 장 보러 갔던 아주버님을 급히 찾고있으니 빨리 돌아오게 하오.”
라고 전하게 하였다. 큰 집은 항일연군이고 아주버님은 전광을 가리키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때 김주현도 조선으로 들어간 것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하여 이삼덕에서 이 연락을 받았던 이효순과 박금철은 의논 끝에 박금철이 직접 갑산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러잖아도 얼마전에 마동희와 장증렬이 마침 갑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전광동지의 얼굴을 알고있으니 잘 되지않았소. 더구나 마동희가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이 일은 마동희한테 맡기면 금방 해낼 수가 있을 것이오.”
박금철은 부리나케 갑산으로 들어갔다.
마침 전광은 경위원 안경청과 함께 공사장 인부로 위장하고 운흥면 철도노동자들의 숙소에서 숨어지내고 있었는데, 무슨 방법으로 신분을 위조했는지 후에는 또 삼수의 한 목욕탕에 가서 취직까지 하였고, 목욕탕 주인의 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환심을 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후에 이 목욕탕 주인의 딸은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전광을 찾아 장백현까지 들어와 여기저기서 전광의 행적을 수소문하고 다녔다고 한다.
박금철은 압록강을 넘어서기 바쁘게 형사들에게 쫓겨다니다보니 하루종일 물 한 모금도 얻어먹지 못하고 밤에도 인가에 들리지 못하고 숲속에서 자군하였다. 얼굴도 씻지못하고 옷 주제까지 다 망가지게 되자 차라리 비렁뱅이처럼 위장하고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겨우 박달을 찾아냈다. 온 얼굴에 기름때가 번질번질한 것을 본 박달은 하마터면 박금철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니, 왜 이 모양이 됐소?”
“큰일 났소. 권서기(권영벽)가 체포되었소. 신흥촌의 ‘보따지’(이제순의 별명)도 체포되었고, 서응진, 박인진도 다 체포되었소. 광복회는 이젠 끝장났소. 남만성위원회에서 빨리 전광동지를 돌아오라고 하는데 하도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이 모양을 하고 나왔단말이오. 동희만 만나면 금방 소식을 전해주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동희의 집에 갔더니 그의 아버지가 목이 타도록 설명해도 나를 믿어주지 않더구만. 눈치를 보니 동희가 피신하고 있는 곳을 분명 알고있는 것 같던데 죽어라고 알려주지 않으니 낸들 어쩌겠소.”
박금철은 박달과 헤어진 뒤 돌아오는 길에 혜산에 들렸다.
박달이 새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준 돈을 가지고 혜산에 들렸던 것인데, 먼저 목욕탕에 들려 목욕부터 하고 머리를 깎은 뒤에는 나와서 백화상점을 돌아다니다가 그만 최연의 눈에 딱 띄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였던 1937년 11월28일에 옛 친구 김태선의 밀고로 역시 갑산에서 체포되었던 마동희의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소개한바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보탠다면, 마동희를 다룬 북한의 영화와 책들에서 흥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형사들은 마동희에게 “조선혁명군 사령부의 위치를 대라.”고 핍박하고 있다. 김성주도 회고록에서 마동희가 “고문을 받아 정신을 잃었을 때 헛소리라도 쳐서 혹시 혁명의 사령부의 위치를 로출시킬수 있다는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 혀를 깨물어 끊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함남경찰부에서는 마동희와 함께 붙잡혔던 장증렬의 입을 통하여 김성주가 근본 조선땅에 들어와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마동희를 체포할 때 그를 고발하였던 김태선 뿐만 아니라 후에는 장증렬까지도 모두 귀순한 사실이 바깥에 알려졌기 때문에 그들이 설사 김성주가 원래 주둔하고 있었던 원래 밀영위치를 알고 있았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소용없는 일이 되고말았다.
그러면 최연은 마동희의 입에서 구경 누구를 찾아내고 싶었을까?
마동희가 자기의 혀까지 끊어버려가면서 지켜내고 싶었던 사람은 다른 아닌 박달 아니면 전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덕분에 장백과 혜산지방의 광복회 조직들이 거의 모조리 파괴되었던 “혜산사건” 당시 제1차 검거선풍 때에도 박달만은 용케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편 위증민은 눈이 빠지게 전광을 기다리고있었다.
위증민이 파견한 통신원들이 두 다리가 부러지도록 장백지구로 뛰어다니면서 전광과 김성주를 찾았으나, 모두 헛물만 켜고 돌아온데다가 더구나 장백지방의 광복회조직들이 육속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어서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장백현위원회 당 서기 권영벽까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만 체념하고 말았다.
“보나마나 조직을 복구하는 일로 정신이 하나도 없나봅니다.”
하고 박덕산은 곁에서 계속 김성주를 도와 말해주었으나,
“내 보기에는 그런 것만 같지않소. 김사장은 6사를 서정부대에 참가시킬가봐 지레부터 겁을 집어먹고 고의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소.”
하고 전영림이 계속 바람을 일으켰다. 위증민도 처음에는 믿지않았으나 통신원들이 계속 김성주를 찾아내지 못하자 반신반의하기 시작하였다.
“작주동무, 전사령의 말대로 김사장이 정말 그런 것이오?”
위증민이 참지못하고 왕작주에게 물었으나,
“김사장이 얼마나 조직원칙이 강하신 분인데 그렇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지방 당조직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있어서 그것을 복구하느라고 바삐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하고 왕작주도 역시 박덕산과 함께 김성주를 변호했다.
후에 김주현이 드디어 동만강밀영에 나타나자 위증민은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왜 전광동지도 김사장도 모두 연락이 되지않고 있는 것이오?”
“전광동지는 국내로 들어가셨는데, 마침 전광동지가 가 계셨던 갑산군 운흥면의 철도공사판에서 우리 광복회의 회원 하나가 몸에 가지고 있던 전단(傳單, 삐라)이 발각되면서 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다행히도 전광동지께서는 공사판을 빠져나와 삼수쪽으로 몸을 피하셨는데 그뒤로 그만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위증민은 어찌나 놀랐던지 온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그는 한참 아무 말도 못하다가 가까스로 물었다.
“아니 어떻께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직접 가게 만든단말이오?”
“김사장께서 자신이 간다고 나섰지만 전광동지가 듣지않으셨고 나중에는 김사장한테 새로운 임무를 맡기면서 명령까지 내리셨습니다. ”
“어떤 임무말이오?”
“간삼봉에서 당한 놈들이 틀림없이 13도구로 다시 몰려들 것이 분명하므로 이 곳에서 몇차례 더 전투를 벌이면서 서서히 임강현 쪽으로 작전지역을 이동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김주현은 지금 김성주가 임강현 경내로 이동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김성주는 회고록에서 이때 6사 사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고장을 신태자밀영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임강현 경내 안에 신태자라고 부르는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1937년 10월 중순 경에 방진성의 독립여단이 남만에 도착하였을 때 위증민이 그들을 마중하였던 장소는 임강현 육도구진(六道溝鎭) 경내 안의 삼도양차(三道洋岔) 골안이었다.
김주현이 돌아가기 전에 왕작주가 몰래 위증민에게 소곤거렸다.
“북만에 나갔던 방여단장의 부대가 오라지않으면 도착하게 되는데 김사장에게 만나러 오라고 하면 틀림없이 당장에라도 달려올 것입니다.”
이에 위증민은 왕작주가 시켜주는대로 김주현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김주현이 물었다.
“독립여단 인원이 최소한 1백50여명은 될터인데 그들에게 먹일 식량이 만강에 있습니까?”
그 바람에 위증민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동만강밀영에 비축해두고 있었던 식량이 그동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식량들도 또한 위증민이 로령산근거에서 나올 때 김성주가 그와 만나러 오면서  한 개 중대 대원들에게 지워가지고 가져다준 것이었다.
김주현은 김성주의 부탁을 전하였다.
“혜산과 장백 두 지방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나고 있고 토벌대들도 지금 13도구 밀영으로 기어들었습니다. 4사는 다시 화룡쪽으로 이동하였고 2사도 한창 서강쪽으로 이동중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도 쩍하면 무송으로 피신하군 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장백에서 우리를 놓친 놈들의 주의력이 틀림없이 무송으로 옮겨오고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김사장께서는 위증민동지께서도 동만강밀영을 버리고 임강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의향을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지금 삼도양차에 새로 만든 밀영에는 우리가 13도구에서 가지고 나왔던 식량과 서강성전투와 마순구전투 때 또 노획한 식량들까지 합쳐 1, 2년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삼도양차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도양차와 신태자에도 모두 밀영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때문에 독립여단이 서간도에 들어와도 일단은 임강지방에서 휴식하는 것이 좋지않겠는가고 합디다.”
위증민의 얼굴이 드디어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되어 위증민일행은 1937년 10월 중순경에 원래 있던 동만강밀영에서 임강현 경내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삼도양차에서 김성주의 6사 사부와 회사하였다. 동만강밀영에서 만났다가 헤어진지 불과 2개월밖에 안된 시간이었으나 위증민에게는 2년처럼 긴 시간이라고 했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작 김성주와 만난 위증민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김성주의 모습이 얼마나 초췌하였던지 그가 겪었을 마음 고생 또한 이만저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1년동안 장백현을 근거지로 삼고 부채살처럼 조선 북부지방을 향하여 뻗어나가고 있었던 광복회조직들이 육속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웬간하면 조직을 복구할 수도 있으리라는 일루의 희망고 가져보았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쥘부채의 손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공당 장백현위원회 주요 책임자인 권영벽과 이제순까지도 체포되는 바람에 김성주는 그만 맥을 놓다시피 하고말았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소?”
하고 오리려 위증민쪽에서 먼저 김성주를 위로할 지경이었다.
김성주도 자신의 속탄 마음을 인정했다.
“제가 지금 제일 속이 타는 것은 전광동지까지도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결사코 막았어야 했는데 그만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만약 전광동지께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불찰입니다.”
위증민은 계속 김성주를 위로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않소. 원체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이고 또 적후투쟁 경험도 아주 많으신 분이니 금방 별탈이 없이 나타나주실게요.”
위증민은 김성주 등과 함께 여전히 1군의 “서북원정”을 도울데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좀 늦은 감도 없지는 않지만 6사가 비로서 임강경내로 이동하였으니 혜산과 장백으로 쏠리고 있는 놈들의 예봉을 일단 피한 셈이오. 우리 2군은 여전히 남만성위원회와 1로군 당위원회에서 제정한 전략적인 방침에 따라 1군의 서북원정을 지원해야 하오.”
따라서 김성주도 6사가 계속 임강을 거쳐 화전, 해룡쪽을 바라고 이동하여야 한다는 위증민의 결정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에 왕작주가 몰래 막사로 찾아오자 김성주는 그의 손을 잡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말 큰일이오. 큰일. 장작개비를 가지고 눈사태를 녹여내라는 소리가 아니오?”
김성주가 이렇게 불만하자 왕작주가 설복했다.
“성주, 이번에 위증민동지랑 함께 지내면서 1군의 사정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 양사령이야말로 지금 실제로 장작개비에 불을 달아가지고 눈사태를 맞받아나가고 있는 중이더구만. 그분이야말로 1로군과 남만이라는 이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중국의 항일전선을 염두에 담두고 있는 분이니, 어떡하겠소. 우리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그 전략적인 방침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오.”  
“원, 작주는 내 곁을 떠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바뀌고 말았소?”
하고 김성주는 여간 섭섭해하지 않았다.
“속담에도 누울 자리 보고 발을 펴라고 했소. 나는 단순 군사적인 관점에서만 가지고 ‘서북원정’이 불가하다고 보고있는 것이 아니오. 중국 대원들이 비교적 많은 1군을 중심으로 서정부대가 조직되고 있는데 대해서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반대의견을 냈던 적이 있었소? 서정부대에 참가시킬 부대를 내놓으라고 해서 결국 8퇀도 내놓지 않고 어쨌소. 그런데 2, 4, 6사 전부를 서쪽으로 이동시키려는 것은 문제가 있단말이오. 보다시피 우리 6사에는 조선동무들이 많소. 모두 자기의 조국을 눈앞에 두고 있소. 이 동무들한테 조국을 등에 지고 멀리 서쪽으로 가서 싸워야 한다고 설복하란 말이오?”
김성주가 이처럼 반발하자 왕작주는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김성주쪽에서 게면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왕작주를 툭 건드렸다.
“왜 말이 없소? 갑자기 바보가 됐소?”



[생략]



김성주의 회고록에서 “남패자”(南排子)와 “마당거우”는 아주 유명하다.
특히 남패자에서 지내는 동안 김성주는 처음 양정우와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자세하게 소개하겠지만 양정우는 김성주와 만나러 직방 남패자까지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북한 석윤기의 장편소설 “고난의 행군”에서도 이때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신변에 경위원들만 몇몇을 데리고 남패자에서 회의하러 북패자로 찾아가는 밤길에 대한 묘사가 여간 정취롭지 않다.
물론 이 소설에서도 남패자 당시의 모든 회의들은 전부 “김일성”이 조직하고 주재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김성주가 주둔하고 있었던 남패자의 밀림속으로 다른 부대의 간부들이 찾아왔어야 옳았다. 거꾸로 김성주가 1백 40여리나 되는 밤길을 걸어서 북패자로 회의에 참가하러 가군 했다는 설명은 이해가 되지않는다.
밤에 길을 떠나 새벽에야 회의장소였던 북패자에 도착하군 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과연 북패자에는 누가 있었던 것일까? 중국측의 일부 자료들에서는 당초 방진성의 독립여단이 북만에서 돌아왔을 때, 처음부터 임강현 경내로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몽강현 경내의 북패자에 들어와서 자리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위증민이 독립여단을 마중하러 먼저 몽강현 경내로 들어왔으며, 뒤따라 전광의 인솔하에 2군 군부도 함께 이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러나 어쨌던 “휘남현성 전투” 이후 위증민은 독립여단 일부를 북패자에 남겨두고 그 자신이 방진성과 함께 양정우를 찾아 떠났다. 또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위증민은 청원현 경내에서 끝내 열하성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양정우가 환인, 관전근거지나 아니면 로령산 옛 근거지로 돌아오지 않고 어쩌면 금천, 하리쪽으로 이동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짐작에 의해 다시 휘발하 남쪽으로 출정하였는데, 이 때문에 몽강쪽으로 몰려들었던 일본군 헌병 제3연대와 함께 만주군 동국화여단 1천여명이 그 뒤를 따라 1군의 옛 근거지였던 하리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하리에서도 양정우를 못 만나자 다시 또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강현 경내로 들어오자 이번에도 또 휘남과 화전, 즙안쪽의 만주군이 임강쪽으로 몰려들었다.
이 기회를 타 2군 군부는 몽강현 경내의 남, 북패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생략]



전광은 1938년 2,3월 경에 남, 북패자를 모조리 김성주에게 맡겨놓고 그 자신이 직접 독립여단 정치위원 이준산과 함께 백여명에 달하는 대원들을 데리고 몰래 즙안경내의 로령산구로 이동하였다. 원래의 목표는 환인, 관전근거지였으나 노상에서 마침 그를 찾아오고 있었던 이명산과 만나게 되었다. 그때 이명산을 보았던 연고자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즙안의 오도령에서 그 분을 만났는데, 머리가 삼검불이었고 온 얼굴에 멍이 들어있더라.  신발도 한짝을 잃어버려 한쪽 발은 맨발바람이었다. 그리고 왼쪽 손에는 이빠진 빈 밥그릇을 들고있던데 완전히 비렁뱅이 모양을 하고 있더라. 발바닥에서 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발이 너무 아파 신을 바꿔가면서 신고 절뚝거리면서 걸어오고 있더라.”
전광은 이런 모습으로 변한 이명산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즙안 오도구(五道溝)의 로령산기슭에서 항일연군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왔던 이명산은 전광에게 대고 소리쳤다.
“제길할, 내가 영환(永煥, 卽孫永煥, 이명산의 본명)이오. 왜 날 알아보지 못한단말이오?”
그제서야 전광은 깜짝 놀라 이명산과 부둥켜 안았다.
어찌나 많이 굶고 또 목도 말랐던지 이명산은 먹을 것부터 찾았다. 이준산이 곁에 함께 있다가 사람을 시켜 큼직한 전병(煎餠) 한 장과 물병을 건네자 이명산은 그것을 받아 목이 메어질 지경으로 정신없이 먹어댔다.
“원, 천천히 먹소. 숨이 넘어가겠소.”
전광은 이명산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물었다.
“도대체 남만의 최고 멋쟁이를 이 모양으로 만든 원인이 무엇이오? 어서 말해주오.”
“먼저 내 묻는 말이나 대답하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었소?”
“광훈이한테로 가면 혹시라도 양사령이 있는 곳을 알 수 있겠나해서, 로위는 금천, 하리쪽으로 갔고, 나는 지금 환인, 관전쪽으로 가는 길이었소.”
전광의 대답에 이명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할 일이오. 여기서 나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오.”
“왜 그러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게요?”
“말두마오. 일구난설이오.”
하고 이명산은 계속 뜸을 들이면서 쉽사리 알려주려고 하지않았다.
그러자 전광은 더욱 급해나서 재촉했다.
“아니, 빨리 말을 하라니까.”
“내가 창피해서 차마 입밖에 꺼내지 못하겠소.”
“혹시 광훈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요?”
전광은 “창피하다”는 말에 벌써 절반쯤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명산이 머리를 끄떡이자 전광도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한참 뒤에 이명산은 이준산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조선말로 안광훈이 체포되어 변절한 사실을 전광에게 전해주었다. 듣고있던 전광의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질려지기 시작했다.
“전광동지,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이준산이 참지못해 물었지만 전광은 계속 대답하지 않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제 양사령을 만난다고 해도 정말 볼 면목이 없게되었소.”
전광이 겨우 한마디 하자 이명산도 머리를 끄떡였다.
“정말 무슨 낯을 들고 다시 1군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소.”
“아니 그렇다면 환인현위원회도 파괴되었소?”
“현위원회뿐이겠소. 성위원회도 다 파괴되었소. 근거지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고, 다 붙잡히고 이제는 나 혼자만 남았소. 더는 재생이 불가능하오.”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푹 떨구고 앉아있던 이명산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전광은 이명산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 죽었다”는 것은 그동안 이명산과 함께 흥경, 환인지방을 개척해왔던 1군 독립사 시절의 친구들이었던 이홍광으로부터 시작하여 한호와 한진(韓震)에 이르기까지 모두 환인현 경내 안에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일찍 흥경지방으로 나왔던 사람은 바로 이홍광이었다.
제1차 “서북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양정우의 부탁을 받고 기병부대를 조직하러 흥경지방에 나왔던 이홍광을 도왔던 사람이 당시 흥경현위원회 서기로 있었던 이명산이었다. 이후 이홍광이 사망하고 그의 사장직을 이어받았던 부사장 한호와 군수부장 한진은 환인현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조동하였던 이명산과 함께 환인, 관전근거지를 개척하는 일에 직접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한호가 사망한 뒤에는 안광훈이 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환인현 경내로 들어오면서 여전히 한진과 안광훈, 이명산 세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계속 환인현 경내의 노독정자(老禿頂子)와 이층정자(二層頂子)、만인구(万人沟), 해청화낙(海清伙洛)、보악보(普乐堡)、전후협도자(前后夾道子) 등지에다가 저그만치 10여개에 달하는 밀영들을 건설하였다.
개인적으로 한진은 안광훈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이기도 하였다.
1928년에 남만청총의 상무집행위원 신분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몸을 담았던 한진은 바로 안광훈의 소개로 반석현의 석취진 초석산 조선인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이후 안광훈의 소개로 이동광과 만나게 되었으며, 1930년 8월에는 정식 중공당원이 되었다.
그의 중공당 입당 보증인도 바로 이동광과 안광훈 두 사람이었다.
당시 남만의 중공당 조직은 반석중심현위원회 서기였던 전광을 위시하여 안광훈과 이동광, 조명신(趙明信), 김창근, 송명식(宋明植), 풍검영, 이명산, 한진 등 조선인 출신 당 간부들의 세상이었다. 후에 양정우가 오면서 전광이 비록 서기직에서 내려앉았으나, 서기직은 여전히 조선인 이동광의 차지가 되었고 중국인 간부들은 거의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양정우는 자기 이전에 벌써 만주성위원회로부터 직접 파견받고 내려왔던 중국인 간부들이 모두 배겨나지 못하고 남만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이면에는 바로 전광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냈다. 총명한 양정우는 1933년 이후 전광이 비록 만주성위원회로부터 비판 받고 처분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예우면에서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언제나 깍듯하게 원로로써 대우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사문제에 있어서 무릇 그가 추천하는 인물들은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중용하였다.
그리하여 양정우의 신변에는 거의 전부 조선인 간부들이 포진하다시피 했다.
남만의 조선인 간부들은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군사조직까지도 모조리 장악하였다. 1군의 초창기 양정우가 가장 의거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1사 사장 이홍광과 2사 참모장 이송파였다. 2사의 경우, 사장으로 임명되었던 중국인 간부 조국안은 조선인 참모장 정수룡에게 권총까지 빼앗기고 부대에서 쫓겨났던 적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양정우는 정수룡이 전광의 심복부하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던 까닭에 정수룡을 함부로 처분하지도 못하고 그냥 조동시키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군 하였다.


[생략]


부천비(傅天飛, 別名傅云翼、傅崇禮、傅世昌)는 1933년 6월에 만주성위원회로부터 파견받고 양정우를 도우러왔던 공청단 간부였다. 남만으로 조동할 때 겨우 22살밖에 안되었던 새파랗게 젊은 중국인 청년이었다. 그는 사업에 착수하기 이전에 먼저 양정우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이 곳은 조선사람들의 세상이라, 조선사람들한테 잘못 보이면 큰일이 나오.”
이것이 양정우의 대답이었다.
“제가 순시원으로 주하(珠河, 卽今日的尙志)에도 내려가보군 하였지만 그곳에도 조선동지들은 적지않습디다. 모두 높은 직위에 있는 분들이지만, 그렇다고 잘못 보인다고해서 무슨  큰일이 나거나 하지는 않는 같던데요. 이 곳은 왜 이 모양인가요?”
부천비가 이해할 수 없어하자 양정우는 한술 더 떴다.
“조선사람들속에서 가장 위망이 있는 간부 몇을 뒷심으로 두고있으면, 사업을 진행하는데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게되오.”
“그러면 정우동지에게도 뒷심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 뒷심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부천비에게,
“차차 알게될 것이오.”
얼마후 부천비는 해룡과 반석지방으로 내려가 공청단조직을 지도하였다.
이후 반석중심현위원회 선전부로 소환되어 올라왔다. 선전부장 안광훈이 데리고 있었던 풍검영, 이명산, 한진 등이 모두 유하현위원회와 흥경현위원회 등 각지 현위원회의 책임자로 발령받고 떠나는 것을 보면서 부천비는 새삼스럽게 양정우가 귀띰해주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남만의 당 조직은 모조리 이 사람들이 틀어쥐고 있구나.’
부천비는 이때로부터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전간사였던 부천비는 안광훈의 비서였던 구은혜가 남편 풍검영과 함께 유하현위원회로 조동하자 비서노릇까지 함께 전담하다시피 했다. 일찍 하르빈에서 동북상선학교(東北商船學校)를 다녔던 부천비는 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었던 만주성위원회 비서장 풍중운(馮仲雲)의 소개로 중공당원이 되었고, 공청단 만주성위원회에서 사업할 때에는 강판글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거기다가 또 글재간까지 있어 삐라를 찍고 호소문을 만들 때면 언제나 그가 내용초안을 쓰군하였다.
“세창(世昌, 卽傅世昌, 부천비의 별명)의 문장은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로구만. 거의 손 댈 떼가 보이지 않소.”
하고 풍중운은 언제나 칭찬이 자자했다.
당연히 안광훈도 부천비의 재간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안광훈은 처음에 1군 군부 교도연대 정치위원으로 조동하면서 금천 하리근거지로 들어갔는데 그때 부천비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후 얼마 안되어 1군 정치부 주임으로 높이 올라갔는데 부천비에게 동북인민혁명군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선전간행물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하면서 그를 이홍광의 부대에 배치하였다. 부천비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그 유명한 이홍광의 부대로 배치된다는 바람에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랐다. 그때 부천비는 이홍광을 따라 환인, 흥경지방으로 나왔으며 여기서 한진, 이명산 등 낯익은 얼굴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조선인 간부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이홍광 본인이 양정우의 가장 든든한 군사조수인데다가 1군의 기간부대였던 독립사 참모장이었고, 한진은 독립사 당 위원회 서기였다. 이후 독립사가 1군으로 개편되고 산하 부대가 1, 2사로 나뉘면서 1사 정치부 선전간사로 배치되었던 부천비는 그동안 “홍군소식”, “인민소보” “인민혁명군사”, “청년의용군보” 등 많은 신문들을 만들어냈다. 1935년 10월4일 판(版) “인민군화보”에 실렸던 1, 2군의 회사정경을 담은 강판 그림도 다름아닌 바로 부천비의 작품이었다.

이듬해 부천비는 1사 산하 신편(新編) 제4퇀(연대) 정치위원으로 조동하였다.
전임자였던 한진이 1936년 3월2일, 4퇀(연대)이 방금 성립된지 불과 하루만에 흥경현 평정산 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포위를 돌파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군 정치부 주임과 군 참모장까지 함께 겸직하게 되었던 안광훈은 부천비를 다시 1사 정치부로 소환했다가, 1937년 9월에는 남만성위원회 비서처로 조동시켰다. 얼마 뒤에 비서처 편집실 주임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부천비의 뒷심은 안광훈이었던 셈이다.
이때쯤 안광훈은 남만성위원회 뿐만 아니라 1군의 모든 일상 사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양정우와 위증민, 그리고 이동광까지도 없었던 환인, 관전근거지에서 그의 직위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1937년 12월로 돌아가, 부천비와 남만성위원회 비서처 인쇄실 주임 번제는 안광훈이 총상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병문안하러 오늘의 요령성 본계시 환인현 사도하자향(四道河子鄕) 경내의 우모대산(牛毛大山) 밀영으로 찾아왔다.
그곳에서 4퇀(연대) 시절 익혔던 얼굴 몇몇과 만나게 되었다.
“동무들은 수퇀장(隨團長, 卽隋相生, 又稱隋祥泰)의 경위원들이 아니오? 어떻게 여기에 와있소? 수퇀장도 함께 오셨소?”
“수퇀장은 희생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그 중의 한 대원이 얼굴을 떨구고 흐느껴 울었다.
“동무는 누구요? 다른 동무들은 모두 본적 있는데 동무 얼굴만은 좀 생소하구만.”
“네, 저는  염원택이라고 부릅니다. 부정위(傅政委, 卽傅天飛)동지께서 4퇀을 떠나신 뒤에 왔습니다.”
그 대원이 대답하자 다른 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을 받았다.
“저희는 수퇀장이 희생된후 호부장(호국신)과 함께 끝까지 싸우려고 했지만, 호부장께서 저희들이라도 살아서 탈출해야 군부에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안광훈은 부천비와 번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내가 고산자에서 혼자 빠져나온 뒤에 팔리초밀영에 남아있던 호국신도 풍검영이 변절한 것을 눈치채고 뒤따라 탈출했는데 놈들이 유하에서부터 환인까지 끈질기게도 뒤쫓아왔던 모양이오. 호국신이 양호구의 도목구밀영까지 와서 미처 숨도 돌리기 전에 토벌대가 들이닥쳤다오. 수퇀장이 호국신을 엄호하다가 사망했고, 살아남은 이 동무들이 끝까지 호국신을 엄호하면서 흑갱대지(黑坑大地)쪽으로 이동시켰지만, 결국 호국신도 총상을 당하고 놈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고 하는구만. 호국신이 이 염원택에게 다 같이 죽으면 안되니까 나머지 대원들을 데리고 포위를 뚫고나가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구만.”
부천비는 돌아올 때 안광훈에게 물었다.
“수퇀장이 데리고 있던 이 경위원들은 신변에 두실 것입니까?”
“차차 봐가면서 정빈한테 보내어 새로 배치하겠소.”
부천비는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염원택이라는 저 경위원은 내가 4퇀에 있을 때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수퇀장의 경위원들은 대부분 수퇀장이 해청화락(海清伙洛)에서 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한 동네 친구들의 자식들인데 염원택은 어디서 불쑥 나타난 경위원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상스러운데가 있으니 염원택이 데리고 온 수퇀장의 경위원들을 모조리 다른 곳에 보내도록 하십시오.”
하고 부탁했으나 안광훈은 들으려고 하지않았다.
안광훈은 흑갱대지 밀영에서 호국신 등이 토벌대에 사로잡혔던 시간과 염원택 등이 자기를 찾아왔던 시간을 대조해보고는 꼬물만치도 의심을 품지않았다.
“호국신은 통화에서부터 쫓아왔던 경찰대놈들에게 체포되었다고 하오. 아마 지금쯤은 통화에 끌려가있을 것이오. 사선을 헤치고 여기까지 소식을 전하러 온 경위대원들을 의심해서야 되겠소. 이 동무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아직도 호국신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오. 그러니 쇼푸(小傅, 卽傅天飛)와 로판(老攀, 卽攀帝)도 빨리 지금 있는 밀영을 버리고 이 곳으로 옮겨오도록 하오.”  
부천비는 안광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천비와 번제는 원래 있던 자기들의 밀영으로 돌아온 뒤에 의논했다.
“이 곳은 호국신이 알고있는 곳이므로 더는 있을 수가 없소. 그런데 안참모장이 있는 곳으로 인쇄소까지 모조리 다 옮겨간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소.”
“등잔밑이 어둡다고, 놈들이 불을 지르고 간 양호구로 다시 몰래 돌아가면 어떠할가요? 제가 4퇀(연대)에 있을 때 우모구(牛毛沟)의 서차(西岔)에 있는 동굴에서 며칠 지냈던 적이 있는데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곳에서 안참모장이 계신 우모대산(牛毛大山)과도 거리가 60여리밖에 안되니 서로 연락하기도 좋지않겠습니까.”
하고 부천비가 의향을 내놓아 번제도 동의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남만성위원회 비서처를 우모구 서차동(西岔洞)으로 이동시킨 뒤였다.
안광훈은 그때까지도 수상태의 경위원 "염원택"으로 위장하고 우모대산으로 들어왔던 염응택 등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고 신변에 데리고있었다. 우모대산은 환인현성에서 1백40여리 떨어진 원 사도하자 즉 오늘의 환인현 대전자촌(大甸子村)과 보악보진(普樂堡鎭) 사이에 펼쳐져 있는 해발 1319.8미터나 되고 동서로 백여리가 넘는 거대한 면적의 산이었다.
이 산을 남북으로 60여리를 사이에 두고 보악보진 쪽의 와방촌(瓦房村)은 매주에 한번씩 장까지도 서군하는 큰 동네였다. 염응택은 와방촌에 큰 삼촌이 살고있는데 푸줏간을 차리고 있으니 찾아가서 설에 먹을 고기를 구해가지고 오겠다고 안광훈에게 요청하였다.
안광훈의 허락을 받고 몰래 와방촌으로 들어갔던 염응택은 직방 큰 삼촌의 푸줏간으로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정작 푸줏간 안방에서 그를 마중한 사람은 일본인 키시타니 류이치로(岸谷隆一郞)였다. 키시타니의 통역관으로 통화성 경무청에 함께 부임했던 중국인 유술렴(劉述廉)의 공술자료에 보면, 부임한지 불과 한달도 되지않았던 키시타니는 풍검영과 호국신을 체포한 뒤에는 직접 그들 두 사람을 모두 데리고 환인현 보악보진 경내의 와방촌에 들어와 잠복하였고, 겉으로는 푸줏간을 차려놓고 있었다.


[생략]



키시타니 경무청장은 대단한 수완가였을 뿐만 아니라, 아주 끈질긴 사람이었다.
확인이 가능한 키시타니와 관련한 자료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1901년(메이지 34년) 생이니 이때의 나이가 겨우 30대 중반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처럼 풍채좋은 흰 수염을 턱에 매달고있었다. 일본 아오모리(青森県) 구로이시(黑石市)의 한 대장쟁이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가 대쟁장이 겸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생활은 어려웠고 동생 키시타니 토시오(岸谷俊雄)는 아무리 일해도 편해지지 않는 부모의 생활을 보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키시타니도 동생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의 삶을 풍요롭게하기 위해 만주의 권익을 이용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보다 상당히 현실적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당시 러일협회에서 꾸렸던 학교에 들어가 러시아어를 배웠고, 아오모리 현에서 응시자 11 명 중 유일하게 홀로 자비 유학생에 선정되기도 했다. 1927년에 키시타니 류이치로는 하르빈 러일협회 철도학원에서 공부한 뒤 만주 철도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그때 배치되었던 부서가 만철 조사부 러시아 반이었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만철 조사부는 관동군 정보부와 더불어 만주 경내에서 일본 정부가 직접 운영하였던 거대 정보기관의 하나였다. 틀림없이 이때 쌓았던 경험이 후에 통화성 경무청장으로까지 조동하게 되었던 원인 내지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일찍 어려서부터 마르크스에 대하여 심취하였던 적이 있는 이론가형의 수사관출신이기도 하였으니, 키시타니 류이치로는 항일연군의 포로들을 대할 때 자신의 특기와 장점들을 그야말로 능수능란하게 발휘하였다. 나중에는 양정우에 대한 소탕작전까지도 성공시켰을 지경으로 그는 크게 이름을 날렸다.
물론 오늘날의 중국과, 북한에서는 악마 취급을 당하고있지만, 그의 통역관이었던 유술렴의 회고담 한토막을 돌아보기로 하자.

“당시 키시타니에게 붙잡혔던 항일연군 포로들은 거의 한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두 투항하였다. 나는 통역관으로 곁에 있었지만 사실상 그냥 형식적에 불과했다. 키시나티는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에도 아주 능했는데, 말할 때 발음만 조금 서툴렀을 뿐 직접 중국글로 편지도 썼고 시간이 날 때면 붓글도 연습하군 하였다. 그때 포로된 항일연군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들이었는데, 키시타니는 그들을 심사할 때면 절대로 때리거나 욕을 하지 않고, 자기도 농사꾼이었고 어렸을 때 굶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널어놓군 하였다. 너무 배가 고파 소똥 위에 떨어진 쌀알을 발견하고 그것까지도 주어서 씼어먹었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엉엉 울기까지 했다. 포로들도 같이 따라 울었다. 그러다가 후에는 바로 당신네처럼 공산혁명을 일으켜 부자들을 모조리 소멸해야만이 가난한 자들도 잘 살 날이 오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으며, 어렸을 적의 꿈은 러시아에 가서 사는 것이었다고 하더라. 자기가 러시아어를 배웠던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다고 하지않겠나. 풍검영이나 호국신, 안광훈같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들까지도 결국 키시타니에게 설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키시타니는 호국신을 붙잡은 뒤에 그의 경위원들부터 먼저 설복하였다.
그 경위원들가운데서 비교적 똑똑하고 총명한 자들만을 따로 뽑아낸 뒤에 염응택을 그 속에 잠복시켜 함께 우모대산으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물론 출발직전 풍검영과 호국신으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았다.
안광훈과 아주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던 이 두 사람은 안광훈의 사소한 생활습관은 물론 평소 그가 좋아하는 음식과 취향에 이르기까지도 너무 자세하게 잘 알고있었다.
“두분은 만약 안광훈을 만약 산채로 붙잡게 되면, 그가 우리에게로 귀순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쯤 된다고 보시오?”
하고 묻는 키시타니에게 풍검영과 호국신은 거의 약속이라도 하듯이 각각 반반이라고 대답했다. 먼저 그가 귀순하지 않을 것이라는 원인가운데는, 그의 특수한 가족사가 들어있었다. 안광훈의 아버지 안봉근은 1910년 3월 하르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던 그 유명한 안중근(安重根)과는 사촌형제간이었다. 안봉근의 아버지 안태근은 바로 안중근의 숙부였던 것이다.

안중근의 조카 둘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안광훈뿐만 아니라 그의 친 동생이었던 안광호(安光浩)도 역시 양정우의 직계중의 직계로 간주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때 안광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1937년 6월16일에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이동광과 비서처장 김영호 등도 모두 함께 사망하였던 전투를 바로 안광호가 지휘했던 것이었다.
안광훈 본인은 이 전투에서 동생 안광호가 이미 사망한 사실도 아직 모르고있었다.
그러나 키시타니는 즉시 흥경현(興京縣)에 연락하여 황토강자(黃土岗子) 부근의 대와자구(大瓦子溝)에서 일본군 군용열차를 전복하려다가 실패하고 저그만치 40여명이나 되는 항일연군이 사살되었던 전투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흥경현 경무과에서는 이 전투 직후 부대를 이탈한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군부 비서 1명(이름을 알 수 없음)을 당지 경찰이 붙잡아 취조를 마친 뒤에 현재까지 계속 수감중에 있다는 연락을 연락을 보내왔다.
키시타니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그 비서출신 항일연군 도주병을 와방구까지 데려왔다.
“그 전투에서 교도퇀(연대) 허퇀장(許團長, 卽許國有)과 한처장(韓處長, 卽韓仁和)만 겨우 빠져나왔으나 모두 중상을 입었고, 나머지는 전부 죽었습니다.”
“나머지란 어떤 사람들이냐? 왜 이름은 모르고 성씨만 아느냐?”
“성씨에다가 직책을 붙여서 부르기만 했으니까요. 허퇀장을 엄호하느라고 뒤에 남았던 안정위(安政委, 卽安光浩)가 사망했습니다. 그 외 남만성위 간부들이 또 몇 명이 더 있습니다.”

키시타니는 안정위를 백프로 안광호라고 판단했다.




박상철   - 2018/05/10 00:27:50  
권영벽이 체포되던 과정도 세상에서 처음 밝혀지고 있는 같은데요?
박금철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이구요.
박금철은 북한에서 벌써 1960년대에 숙청되다보니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은 모조리 매장되었던것인데
김일성평전에서는 모조리 다 발굴하시여 다시 재생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의 본래 모습을 환원시키고 있는 대단한 작업이라고 보여집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   - 2018/05/15 00:24:42  
유작가님의 평전은 과거 다른 사람들의 평전과 달리 적쪽의 정보에 대하여 오히려 아군쪽의 정보보다도 더 많이 들고 꿰는것이 특징인것 같음 ...
재한동포   - 2019/03/14 03:27:41  
사진자료 정말 소중한것 같아요.
추천하기 목록으로

다음글 - 김재범의 귀순 전후과정-김일성 평전(하권) 발췌 [2]

Copyright 1999-2019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