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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집 (葬屋)
피안   Hit : 14900 , Vote : 392        [2011/05/03]



   [글 쓴이: 유순호, 뉴욕조선족 통신 대표, 재미 조선인 작가]

   [이 수필은 혐오감을 주거나 사망, 잔혹 등 형상을 불러 일으킬수 있으므로 미성년자 혹은 심약자가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 권고를 무시하고 일어나는 모든  불쾌한  기분과 정서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 저자로부터]


   뉘 집에 가든지 자그마한 울타리가 있고, 그 울타리 안에 꽃밭이라도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정말 탐 난다. 그것이 설사 다 찌글어져가고 있는 초가삼간이래도 좋다. 꽃밭은 커녕 싸리나무가지로 울바자를 치고, 그 안에 쑥대만 무성해도 좋다. 잡초더미속으로 들쥐가 나들고, 송장벌레가 무리지어 다녀도 좋다. 그 잡초속 한 복판에다가 내 몸 하나만 들어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장집(葬屋)을 만들어놓겠다. 그 안에 들어가  정면으로 누우면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 족골로 빠져나갈 수 있게끔 뙤창도 만들어놓겠다. 그리고는 내가 어질어질할 무렵이 올 때쯤 되면, 만사를 팽개치고 이 장집을 바라고 달려올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여전히 조금씩 움직이고 걸을 수가 있다면, 낮에는 장집 바로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다가도 밤만 되면 어김없이 장집 안에 들어가 죽었을 때의 모습처럼 곱게 단정하게 누워있겠다.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내가 완전히 풍화할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만들겠다.  

   사회부 기자로 있을 때, 나는 에이즈병환자를 취재하였던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의 설명은 2, 3일 사이에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환자의 정신이 하도 말쑥한 것을 보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이불을 목까지 꽁꽁 걷어 올린 환자는 우물같이 어둡게, 깊게 들어간 두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면서 가냘픈 한숨만 쉬고  또 내쉬었다. 이렇게 한 2, 3일만 지나고 나면, 내쉬는 숨만 있고 다시 걷어 들여가는 숨이 없을 때에 바로 죽는 것이겠구나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에 환자가 문득 설음에 북받혀 가볍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생님, 죽고 난 뒤에, 남들이 나의 몸을 마음대로 벗기고 할 가봐 그게 제일 겁나요.”
   “죽고 나면 아무 것도 모를 텐데 왜 그런 것을 다 걱정하나요?”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묻힐 땅이 없어요. 병원에서는 나를 화장할 거예요. 불가마 안에 들어갔다가 잿가루가 되어 나오겠지요. 그것을 바람에 날려 보내던, 물속에 흘려보내던 다 좋다고 봐요. 어서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죽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세요? 죽고 나면 저 사람들이 내 몸의 옷을 벗길기봐 겁나거든요. 몸에서 불결한 것이 흘러나올가봐 난 벌써 한 달째 아무것도 못 먹고었어요. 그런데도 자꾸 뭔가가 흐른단 말이에요 저 사람들이 와서 몸을 닦아줄 때만큼 싫은 일이 없어요. 나 죽고 나면 어떻게 될가요? 저들은 내가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지 모를 거예요. 난 정말 그런 흉악한 몰골을 당하는 것이 싫단 말이에요. 그러는 게 싫어서 감히 죽지 못하겠어요.”

   이렇게 걱정하는 환자에게, 죽게 되면 절대 옷을 벗기지 말아달라는 유서를 써서 의사에게 맡기라고 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입고 있는 이 옷을 절대 벗기지 말고 이대로 함께 화장해달라는 말을 유서 속에 써넣으면 되지않겠는가고 했더니 환자는 비로소 눈빛을 반짝이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뒤의 일은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에이즈병환자를 부러워했다. 죽기 하루 이틀 전까지도 정신이 말쑥해있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감히 자신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친지와 가족들 속에서 먼저 가신 분들치고, 어느 한분이라도 그렇게 행복하게 가신 분들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병상에서 산소 호흡기에 매달려 별의별 추한 모습을 다 보여주다가 갔다. 그러니 나라고 뭐가 다르랴! 언젠가는 나도 틀림없이 그런 모양을 하고, 그나마 있던 정, 없던 정까지도 모조리 다 까먹고 가게 될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침, 저녁때마다 의사가 들어와서는 바늘이나 또는 송곳으로 나의 발바닥이나 아니면 손바닥 같은 데를 찔러볼 것이다. 내가 아프다고 꿈지럭거리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줄 알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더는 꿈지럭거리지 않으면 바로 내가 죽은 줄 알 것이다. 그 다음은 나의 이불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나의 허리 밑을 찔러볼 것이다. 그럴 때에도 내가 아주 맥을 놓은 채로 등뼈를 곧게 펴고 있으면, 아, 이제는 진짜 죽었구나고 판단할 것이다. 대부분 정상인들은 이렇게 간다. 곧이어 산소호흡기도 떼어 내고 링거도 걷어갈 것이다. 이럴 때 만약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이 세상에다가 알리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한 3년 쯤 뒤에, 내가 스스로 장집 안에 들어가 나의 시신을 들쥐와 송장벌레들에게 모조리 먹히고 난 뒤에, 아직도 살아있을 나의 아내나, 아니면 나의 아들한테 편지가 한통 가닿게 할 것이다. 내가 풍화되어 있는 장집 주소를 알려주고, 올 때 대나무 칼을 갖고 와서, 행여나 육탈이 되지 않은 나의 뼈다귀가 있으면 깔끔하게, 말쑥하게 치토 하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겠다.   


                                                                                  2011년 5월3일. 미국 뉴욕에서.
      



                                                                                  


황성준   - 2011/05/03 15:01:13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잠간 주저하다가 들어와서 한숨에 읽어버렸습니다.
너무 좋은데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 가끔 읽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군들 죽음 앞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지않겠습니까.
유선생의 죽음의 선언은 정말 독특합니다.
이런것이 아마도 진정한 문학인것이겟지요.
문학적인 상상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수필을 써내실수가 있습니가.
죽음앞에서도 여유롭고 소탈한 그 모습이 참으로 일품입니다.
김선화   - 2011/05/03 15:12:25  
저 워낙은 그냥 제목만 보고 들어오지 않을려 했는데요... 자기도 모르게 들어와서 읽어버렸네요...

죽음에 대한 나쁜 생각이 꽈악 숨 막히게 눌르는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둘째구...

죽을때는 그래두 사랑하는 사람이랑 모두 지켜보는데서 가는것이 더 고독하지 않고

외롭지도 않고 행복하는것이 아닐가요.

생로병사하는것은 인간의 정상현상이 아닌가요.

수치심이나 부끄러움같은것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아서 다른 말씀은 할수가 없지만...

저는 이런 죽음방법 동의할수가 없네요. ㅠㅠ



똑똑똑   - 2011/05/03 17:50:20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고 한마디 할 것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위에 이말들처럼
살찐 들쥐라도 송장벌레가 우글거려도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을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글을 읽은저는 무서운것보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 할수있는 이 현실을,
편한맘으로 받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억울함을 당했대도, 삶이 어떻게 힘들어서 죽고싶을지라도
한사람 한평생 죽는날까지 지금 갖고 있는 생명을, 삶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끝까지 살려는 용기를 잃지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짤막하면서도 너무 재밌는 글입니다~~

추천드립니다~~~
김예화   - 2011/05/03 17:53:15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본적이 없네요,,, 이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사람의 죽음에대해서 생각해보게돼네요,, 태어나면 언젠간 갈 세상인데 자신의 죽음엔 두려움이 없는것같은데 주변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돼는건 참 가슴아프고 두려운것같네요...
나나   - 2011/05/03 20:06:58  
나두 끝까지 읽었습니다
무섭습니다

이런글은 니카에서 처음 읽습니다

죽으면서까지도 아내에게 아들에게 편지를 전하고싶다는말에 감동먹었습니다

휴~

죽기전에 활기차게 살아야겠습니다 ^^

유아저씨~~ 화이팅입니다~~~
최미지   - 2011/05/03 20:26:33  
들쥐 송장벌레...... 그들은 나에 살을 먹고 살진 것이라...

상상하면 많이 끔직하고 잔인하다는 이 사실을 믿겹지 않을래야 안믿을수없구...

이천자 되는 글로 이런수필 표현이 너무 놀랍습니다.

작가님 만이 쓸수있는 이런 도특한 문학수필,,, 좋아합니다...

화이팅입니다~~
최련화   - 2011/05/03 21:15:36  
수필을 창작화, 문학화시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아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도 해학적으로 소탈하게 펼쳐나간 것은 이 수필의 매력인 것 같아요.
나라는 자아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기도 하고, 죽어서 어떻게 할 것이라는,
사후의 일을 계획하기도 하는데, 그때에 이미 장집안에서 풍화되어 있을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리얼하여 섬뜩 몸서리까지 돋게 만들어요.
그러나 결코 저자의 주의 말씀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러지는 않는데요.
최련화   - 2011/05/03 21:24:20  
수필속에서 죽기전까지 정신이 말쑥한 에이즈병환자는,
자기가 죽고나서 당하게 될 수치심을 걱정하여 죽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수필속의 자아는 죽고나면 바로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죽기전까지 병원에서 당하게 될 자신의 몰골을 걱정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내린 결정이란, (꿈이나 계획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장집을 만들어놓고, 인사불성이 올 때 바로 그 안에 들어가서 곱게 누워서 죽겠다고 하면서,
장집에서 완전히 풍화가 되였을 때 쯤 되는 3년 뒤에,
그때까지도 살아있을 아내나 또는 아들에게 편지가 한통 가닿을수 있게끔 만들겠다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최련화   - 2011/05/03 21:26:15  
제일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부분은 마지막 단락이 아닌가요
이미 풍화(죽고)하고나서 해골이 되어 있을 자신의 모습을 가정하여 먼저 설명하는 것이예요.
해골 눈구멍안에서 들쥐가 튀어나오고, 등뼈 밑에 송장벌레가 우글거려도
그들을 해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꼭 편지속에 써넣을거라고 합니다.
과거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풍화시키는 것은 쥐나 벌레들인데,
전문 시체를 갉아먹는 벌레가 있다고 해요.
송장벌레라고 부르는 벌레인데, 이 벌레들이 시신을 깨끗하게 치워주는 청소부로 불리기도 한다나요.
최련화   - 2011/05/03 21:33:53  
그리고 3년쯤 지난 뒤에도 깨끗하게 육탈이 되지 못하였으면
(완전히 풍화하지 못하여 살이 뼈에 붙어있는 경우)
대나무로 만든 칼을 갖고 와서 치토하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가요?
저는 '풍장'이라는 시를 기억이 읽었던 떠오릅니다.
세속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미화시키지도 말고 어떤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 자신의 죽음을 신성화,
혹은 신비화시키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아 달라고 하는 시예요.
자신의 시체를 바람과 햇볕아래서 풍화시켜 자연에서 왔다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죽음을 상징하는거예요.
최련화   - 2011/05/03 21:38:46  
이 수필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것도 어쩌면 생로병사의 원리를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하여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있던 정, 없던 정까지 모조리 까먹고 가는 몰골을 당하기 싫다고 하는 태도는
결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수만은 없는 것이잖아요.
실제로 보면 수필속의 자아가 자기절로 죽음을 마중하고 사후의 뒷처리까지도 치밀하게 계획하는 것은,
결코 죽기 직전에 당하게 될 수치심과, 죽고 난 뒤에 당하게 될 수치심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거에요.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자기절로 마중하고 사후 처리까지 해나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믿음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요?

최련화   - 2011/05/03 21:46:17  
이 수필의 핵심 사항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보고 싶네요.
이 수필의 성격은 상상적이고, 주지적이며, 언어는 담담하고 비장하고 소탈하구요.
주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가 좌우하는 사망의 퍼포먼스같은 방법으로
현실의 허무 의식을 깨고 초월 세계를 지향하려는 작가 자신의 의지같은 것은 아닐가요?
????   - 2011/05/03 21:51:26  
대나무 칼을 갖고 와서,

행여나 육탈이 되지 않은 나의 뼈다귀가 있으면

깔끔하게, 말쑥하게 치토...........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고 한마디 할 것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2011/05/03 21:57:11  
상상만해도 몸서리가 돋는 이런 구절이 왜 필요한지? 이런것도 문학에서 미학이라고 봐줄수가 있는지?

아무튼 유순호란 작가의 작품은 상상 예측 추종 불허!!!

장석준   - 2011/05/03 22:10:14  
행복의 반댓말은 불행이 아니듯이,
죽음의 반댓말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은 불행이 있어 행복한 것을 알게 하는 것과 같은 도리 일 것 같습니다.
죽음을 가정하고, 살아 있는 것의 행복을 새삼 깨우쳐주는 글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설사 죽음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초탈하는 기분으로 맞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왔던 자연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역시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사색속에 빠뜨리는 글입니다.
이것이 문학만의 매력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신지   - 2011/05/03 23:58:28  
우아~ 무섭습니다.
왜 귀신영화두 아닌데.. 무섭습니다.
그 어둠을 누구나 다 맞이한다는 말인가요?

그럼 장석준 님말씀처럼 지금살아있음을 더욱더 행복하게 느끼시란 말씀이겟습니다.
유선생님 작가님 저두 읽구갑니다.

이런수필도 미학입니까?

와~ 대단합니다 .. 꿈에 오지말아야 하는데 ㅋㅋ

화이팅입니다~~~~~
심영   - 2011/05/04 00:24:39  
너무 충격적인데요. ㅠㅠㅠ. 추천드려요.
려수니   - 2011/05/04 01:21:51  
유작가님 글은 항상 새롭구 새롭답니다. 영화 한편을 본듯 너무 재밌게 읽고 갑니다.
<죽음>이 사람들한테 가져다주는건 슬픔뿐만아니라 새로운 운명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구 생각합니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구 언제나 항상 최선을 다하여라!!!>
항상 이 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노력하고 있지만 나 자신의 부족함에 시달릴때가 많다고합니다.
이루지 못한 꿈이 많아서 <죽음>이란 상상조차 해본적없습니다.
지금 할수 있는것이라면 열심히 홧팅하는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저만의 장집(葬屋)을 만들고 싶습니다.
임동욱   - 2011/05/04 02:06:57  
믿겨우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평소에 자주 생각해오군했던 일이 바로 풍장입니다.
나절로 장집을 만들어놓고 죽기 일보 직전에 나 스스로 장집속에 들어가 눕는 일이 정말 멋질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추잡스런 모습으로 구질구질하게 가는 것 보다는 얼마나 자아완성적일가 생각합니다.
자기절로 자기의 죽음을 컨트롤할 수 있고 사후 뒷 처리까지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대찬성입니다!

김흠   - 2011/05/04 02:55:14  
유작가님 새 수필을 읽구갑니다.
선생님의 매개 글마다 읽는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주는듯 싶습니다.
추천드립니다.
이 좋은글을 여러모든 사람들 다 같이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멋지십니다.
플라싱   - 2011/05/04 02:55:49  
이한것도 다 글이라고 쓰는구나..................
왜 이리 징그럽지?
멋진인생   - 2011/05/04 03:39:30  
잘 읽고가요...
다시봐두 넘 멋지십니다.ㅎㅎ
홧팅!!
한정남   - 2011/05/04 04:23:59  
누구나 대면하게될 죽음에 대하여 오늘을 어떻게살아야 할것인가라는 힘을 실어다 주십니다..
좋은글 추천드립니다
신난이   - 2011/05/04 08:38:24  
잘 읽구갑니다 우~
소름이 끼칩니다

잘 읽구갑니다. 아프지않구 건강할때 잘 살아야 겟습니다~~
김희   - 2011/05/04 12:37:32  
쌤...갑자기 무슨 생각에서 이런 글을 쓰셨을까요?
제가 잠깐 글속에 빠져서 상상을 해봤습니다
꽤나 우울할것같지만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겠네요...
전 가끔 도로 한복판에 누워있는 상상합니다
그게 꽤 좋거든요... 그래서 죽음에도 "잘 죽었다는" 말이 따라붙는거군요...
저는 잘 살고싶습니다. 이글을 보고 더욱더요...
오랜만에 읽고 갑니다 화이팅하시고 건강하세요 ^^
어마나   - 2011/05/04 15:32:48  
청설작가님 이글을 읽구갑니다.
온몸이 막 무서워서 떨리는 그런글이였지만, 이런날이 올테지만 지금 건강한 몸으로 이세상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멋지게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 겠다는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때가되면 나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것도 좋은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이런글을 생각해서 쓰셧답니까? ㅎㅎ 청설작가님만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추천합니다~~~~~
최수정   - 2011/05/04 20:32:04  
한참만에 니카에 들렸더니 유순호선생님의 멋진 수필이 있네요

잡초더미속으로 들쥐가 나들고, 송장벌레가 무리지어 다녀도 좋다. 그 잡초속 한 복판에다가 내 몸 하나만 들어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장집(葬屋)을 만들어놓겠다. 그 안에 들어가 정면으로 누우면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 족골로 빠져나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뙤창구멍도 한 두 개쯤 만들어놓겠다.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내가 완전히 풍화할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런데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여전히 조금씩 움직이고 걸을 수가 있다면, 낮에는 장집 바로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다가도 밤만 되면 어김없이 장집 안에 들어가 죽었을 때의 모습처럼 곱게 단정하게 누워있겠다. …

유선생님의 위에 글을 보니 죽음에대한 생각을 다시해 보게 됩니다.

유선생님의 글을보면서 김시습의 시구중 한단락이 떠오릅니다.

…此生吾己斷 (이승을 ..내 벌써 끊어버리니..)

樓迹水雲間 (발자취를 물과 구름속에만 남기리라,)…


유선생님은 자그마한 장집(葬屋)에 들쥐와 송장벌레가 드나들수있게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 족골로 빠져나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뙤창구멍도 한 두 개쯤 만들어놓겠다"고 쓰셨는데 하여간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死觀은 초연합니다!
멋진 수필 잘보고갑니다.^0^~
진심   - 2011/05/04 23:13:17  
시원하게 섭섭하게 그러나 정말 깔끔하고 군더더기 한구절도 없이 잘 마무리된 수필입니다.
읽던 도중에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서 족골로 빠져나간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무렆을 때렸습니다.
사람의 정수리에 백회혈(百會穴이 있고 발바닥에는 용천혈(湧泉穴)이라고 있습니다.
차라리 <백회(百會)로 들어와서 용천(湧泉)으로 나간다>고 하면 더 그럴듯해보이지 않았을가요?
아니지요. 일반 독자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것입니다.

진심   - 2011/05/04 23:16:28  
죽음을 가정하고 쓴 글이니 죽은 뒤의 해골에 대한 표현으로
<두골(頭骨)과 족골(足骨)>로 사용한것은 정확하고 타당한 단어이고 표현법이였습니다.
더욱 우리 한글말 단어 그대로를 사용하였는데도, 아주 낯설어 생소하지만 친근하고
포근하게 안겨옵니다. 이것이 언어의 예술입니다.

김선화   - 2011/05/05 01:50:52  
선생님의 주장이 마음에 안들지만 다시 읽으면서 마지막 표현이 너무 멋진것 같아요.
꼭 드라마속의 장면이 같기도 해요.
<<천국의 계단>>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던것 같아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교통사고로 죽는 남자가 자기의 눈을 여자에게 주고
몇해뒤에 외국에서 카드가 오게하잖아요...


적어도 한 3년 쯤 뒤에, 내가 스스로 장집 안에 들어가 나의 시신을 들쥐와 송장벌레들에게 모조리 먹히고 난 뒤에, 아직도 살아있을 나의 아내나, 아니면 나의 아들한테 편지가 한통 가닿게 할 것이다. 내가 풍화되어 있는 장집 주소를 알려주고, 올 때 대나무 칼을 갖고 와서, 행여나 육탈이 되지 않은 나의 뼈다귀가 있으면 깔끔하게, 말쑥하게 치토 하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고 한마디 할 것이다.
김성희   - 2011/05/05 03:16:55  
논문발표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다가
오늘에야 와서 유작가님의 또 한편 새 작품을 읽네요..
-청설창작문예수필 장집(葬屋) 너무 좋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자신이 만드는 죽음의 퍼포먼스.
현실의 허무 의식이 그렇게 깨지고
인간들 모두가 자신의 초월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참 좋을 것 같아요..
최련화님께서 해주신 이 글에 대한 말씀과 같은 생각이구요.
이 글에서 유작가님이 보여주신 언어의 예술에 대하여
몇마디만 더 하고자 합니다..
김성희   - 2011/05/05 03:22:18  
위에서 진심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 족골로 빠져나간다'는 표현은
참으로 독특한 언어의 예술이 아닐수가 없겠어요.
진심님의 댓글을 통하여 수필의 창작화, 문학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수필의 창작화와 문학화에 이어
수필의 '예술화'에 대하여서도 말하여야 한다고 봐요.
김성희   - 2011/05/05 03:47:22  
이번 수필에서도 보아낼수 있듯이 유순호선생님의 수필작품에서
언어를 통하여 새롭게 표현되고 있는 미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잘 펼쳐보였다고 봐요. 우리가 익숙한 표현대로라면
'머리로 들어와서 발로 빠져나간다'고 하면 될 것이 아닌가요.
만약 이런 표현이 너무 단조롭게 익숙하게 느껴지셔서,
설사 '백회나 용천'같은 유식하고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해봐요.
오히려 글자 장난같은 인상을 주었지도 모릅니다.
존재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일상에서 둔감해진 우리 지각이나
인식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하여서는,
어떤 단어를 어떤 적소에 사용하는가가 얼마나 주요한지를 보여주는거예요.
살아 있는 '나'가 자신이 죽어 있을 때의 시신에 대한 표현,
그것도 시신이 풍화하여 해골이 되었을 때의 표현을
'머리'나 '다리', 또는 '백회'나 '용천'으로 표현하지 않고
'두골'과 '족골'로 표현함으로써, 더욱 풍화의 현실감을 재생시킨 거예요.
김성희   - 2011/05/05 03:59:05  
이런 점에서 진정한 문학수필이란, 물론 문학수필 뿐이 아니겠지요.
모든 장르의 문학이라는 것은 평소 삶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완전 다른 형식의 언어로 낯설게 창작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지않을가요..

김성희   - 2011/05/05 04:09:15  
'낯설게 하기'는 또한 형식에서 드러나요.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유작가님의 수필들에서 볼수 있어요.
제가 일찍 읽은 수필작품들가운데서 가장 시적으로 이미지화되는 현상,
말소리의 운과 같은 형식적 요소들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장면들이 자주 있군했어요.

- 사랑하라 내일이 없을 것 처럼 -

그런데도 나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매일 잘난 내 여자밖에 없다며,
잘난 여자말고 다른 여자들은 모두 못났다고,
못난 여자를 잘난 듯이 차고다니다가
어느 날 잘난 여자에게 보기좋게 채이고 나 혼자만 진짜 못난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장집'에서 표현되고 있는 장면을 골라봤어요.

뉘 집에 가든지 자그마한 울타리만 있고,
그 울타리 안에 꽃밭이라도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정말 탐 난다.
그것이 설사 다 찌글어져가고 있는 초가삼간이래도 좋다.
꽃밭은 커녕 배자로 울바자를 치고, 그 안에 쑥대만 무성해도 좋다.
잡초더미속으로 들쥐가 나들고, 송장벌레가 무리지어 다녀도 좋다.
그 잡초속 한 복판에다가 내 몸 하나만 들어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장집(葬屋)을 만들어놓겠다.
그 안에 들어가 정면으로 누우면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 족골로 빠져나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뙤창구멍도 한 두 개쯤 만들어놓겠다.

시에서처럼 말소리의 운과 같은 형식적 요소들이
유순호작가의 '창작문예수필'작품들에서 얼마나 넘쳐나도록 많은지 몰라요.
소설못지 않게 플롯과 같은 서사구조의 형식도 함께 겸해서요..

김성희   - 2011/05/05 04:18:00  
이런 것들은 꼭 마치도 인간이면, 동물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다리,
또는 네 다리로 걸어다니는 행동의 생활양식을,
인간은 발레라는 독특한 걸음 양식을 만들어 그것에 음악과 함께 안무된 동작을
창조하여 낸 것과 같아요.
아주 간단하게 해석한다면 예술이란 이런 것이 아닐가요.
글은 음악이나 그림처럼 눈에 어떤 색깔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고저장단으로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글은 그 자체가 언어이기 때문에 오로지 언어의 예술을 통하여,
창작화되고 문학화된 작품을 보다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게 되는거예요.
그것을 유순호작가님은 자신의 수필작품을 통하여
유감없이 표현하여 낸 것입니다.
즉 우리 일상의 언어와 다르게 운을 넣거나 또는 수사적 형식을 가미하여
마치 ‘언어의 발레’로 비유할 수 있는 그 같은 수필작품들을 창조하여 낸 것입니다..
김성희   - 2011/05/05 05:23:52  
遺憾点 하나 - 첫단락속에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 잡초속 한 복판에다가 내 몸 하나만 들어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장집(葬屋)을 만들어놓겠다. 그 안에 들어가 정면으로 누우면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 족골로 빠져나갈 수 있게끔 '자그마한' 뙤창구멍도 한 두 개쯤 만들어놓겠다.

'자그마한'이란 같은 단어가 두번이나 중복된 것이 있어요.
앞에서 자그마한 '장집'은 무람없으나,
뒤에 자그마한 뙤창에서 '자그마한'은 필요없다고 봐요. 뙤창은 그 자체가 작은 창문구멍이란 뜻도이 되니까요.
박정규   - 2011/05/05 05:41:52  
저는 마지막구절에 해골 눈구멍에서 들쥐가 튀여나온다는 말 한마디만 끔찍했을 뿐입니다.
그것말고는 너무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저의 기분에 맞는 이야기인데요.
????   - 2011/05/05 05:51:19  
유순호창작문예수필.
어쩌면 중국조선족문학의 새로운 리정비가 될지도 모르는 다는 생각.
이 선경   - 2011/05/05 06:00:01  
역시나 너무 매력적인 유선생님의 수필입니다..
유쾌쌉싸름하고, 쌉싸름 처절한 이런 수필의 느낌은 처음인 것 같아요..
최옥화   - 2011/05/05 10:37:3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었죠~
그래서 사람에겐 동물과 달리 영, 육, 혼이 있다고 합니다.동물은 육과 혼밖엔~~
사람이 흔히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입니다.그럼 우리의 영은 어디로 갈것인가?
천국과 지옥입니다.
눈에 보이는건..........육체의 죽음이라서 두렵고 떨리겠지만...,.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될건 영혼의 죽음입니다.
요한복음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어떤 종교나 물론..........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단.............기독교는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육체의 죽음을 기독교에선 옆집에 놀러간다고로만 생각합니다.
주변 진정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세요~~그럼 저의 말이 무엇인지 알수잇을껍니다.
향화   - 2011/05/05 10:48:09  
최근에 제가 완전 빠져있는 한국드라마 <49일>도 보면 령혼은 꼭 있을것이라고 믿어요.
그런데 정말 령혼은 죽은 시체까지도 재생시킬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건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숨은 그냥 붙어있는 상태가 아니였나요?
순호아저씨 수필에서는 자기절로 자기를 풍화시켜 다 뼈만 났았다고 그랬는데요... ㅠㅠㅠ
죽지않고 살아있을수 있다는 말이나요?
저는 우에 분의 말씀이 리해가 안되네요...
진심   - 2011/05/05 11:42:32  
이 수필에서 제일 주요한 것은 소재의 형상적 발견입니다.
형상은 상상의 세계에서 작가에 의해 발견됩니다.
여기서 제일 주요한 것은 작가가 발견해낸 소재의 형상이
작가 자신의 것만이 아닌 독자들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독자들이 읽고나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작가 혼자 이야기네.>하고 판단해버리면,
이 수필의 형상적 발견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즉 작가가 표현하여 낸 상상력의 세계가
다른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는 것이 됩니다.
최옥화   - 2011/05/05 11:44:40  
제가 말씀드릴수 있는건 단 하나~~ 예수를 믿으면 이해할것입니다.^^
진심   - 2011/05/05 11:58:05  
문학이란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입니다.
소재란 상상력에 의하여 형상화되는데 나 한사람만의 이야기같은 소재를,
나 뿐만 아니라 나 밖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같은 생각을 할수 있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만들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될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남이 다 할수 있는 평범한 생각 같은 것을
형상화하여 작은 생각 하나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관심하고 생각할수 있는
문제를 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작은 소재 하나에서도 지구촌 인류 모두의 문제를
이야기할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장집(葬屋)이라는 이 수필에서 보세요.
죽는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소재이지만 인류 독자들 모두의 관심사가 됩니다.
죽어갈 때와, 죽은 뒤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여 낸 것은,
이 수필의 창작적 변화인 것입니다.
이럴 때 누가 함부로 수필은 자기 체험적 문학과, 자기 체험에 대한
고백문학이라고만 단순하게 정의할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의 죽은 뒤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살아있을 아내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다가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할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문학 이론에서 수필의 현대적 개념을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고 하는 것과 얼마나 잘 부합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만큼이나 이 수필의 창작양식 또한 눈부시도록 현란합니다.
자신의 죽은 뒤(풍화하고 난 뒤의 시신)의 모습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가정하면서 쓰고 있는 것인데도,
독자들의 눈앞에 실제로 풍화하고 난 뒤의 자신의 시신 모습을,
보는 듯이 그려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   - 2011/05/05 12:25:31  
이 수필이 얼마나 창작화가 잘 되고 또 문학화가 되었는가는,
이 수필의 형상창작이 단지 소재의 형상적 발견에서 멈추지 않고,
시적 정서의 산문적 형상화를 한 것입니다.
위에서 김성희박사님이 예문까지 들어가면서 지적하여 주셨던,
시적 절주감을 일으키는 서사형태를 보면,
이 수필의 창작양식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원래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창작문예수필이란 이론적으로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라고 부를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자면, 은유와 상징을 통한 소재에 대한 비유,
이것이 첫째입니다. 다음 두번째는 그렇게 비유된 소재에 대한 시적 정서의 산문적 형상화,
이것이 둘째가 됩니다. 세번째는 바로 그것을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형태의 스토리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진심   - 2011/05/05 12:37:36  
마지막으로 이 수필의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 할 차례입니다.
최련화님이 제대로 보셨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자기가 좌우하는 사망의 퍼포먼스, 맞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현실의 허무 의식을 깨겠다는 의지의 고백도 맞습니다.
그러나 초월 세계를 지향하려는 작가 의지는 어딘가 미심쩍은데가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상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인사불성이 되어 산소호흡기에 매달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 스스로의 풍화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가 장집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곱게 누워 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도 주제가 무엇인지 잘 알리지 않습니다.
독자들을 가장 섬뜩하게 만드는 마지막 단락을 읽읍시다.

-적어도 한 3년 쯤 뒤에, 내가 스스로 장집 안에 들어가 나의 시신을 들쥐와 송장벌레들에게 모조리 먹히고 난 뒤에, 아직도 살아있을 나의 아내나, 아니면 나의 아들한테 편지가 한통 가닿게 할 것이다. 내가 풍화되어 있는 장집 주소를 알려주고, 올 때 대나무 칼을 갖고 와서, 행여나 육탈이 되지 않은 나의 뼈다귀가 있으면 깔끔하게, 말쑥하게 치토 하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고 한마디 할 것이다.

진심   - 2011/05/05 13:28:17  
여기서 들쥐와 송장벌레가 나옵니다.
이 수필의 시작 때에 이미 한번 나왔던 것입니다.

-잡초더미속으로 들쥐가 나들고, 송장벌레가 무리지어 다녀도 좋다.
(첫 단락, 세번째 줄)

이런 구절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이론에서 복선(伏線)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미리 짐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겟습니까.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미리 그 사건의 가능성을 암시해 두는 것과 같은 도리입니다.
잡초더미속에 뱀이 나올수도 있고, 잠자리가 날아다닐수도 있고,
별의별 이상한 벌레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쥐와 송장벌레이겠습니까.
바로 쥐와 송장벌레는 시신을 해부하여 흙으로 만들어버리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시신 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우연하게 죽어있는
여타 동물들의 시체도 해볓아래서 썩어(풍화)가고 있을 때면,
항상 그 시체에는 쥐와 송장벌레들이 매여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연의 청소부로 불리기도 하는 그런 유익한 동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서두에서 굳이 이 두 동물의 이름을 미리 꺼냈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결말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동물의 기능을 위하여,
복선을 깔아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들쥐와 송장벌레가 나타날 때,
이 들쥐가 처음에 나타날 때와 다른 것은 <살찐 들쥐>라는 것이고,
처음에 나타날 때는 그냥 잡초더미속에서 나드는 들쥐였는데,
마지막에 나타날 때는 풍화가 된 해골의 눈구멍안에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나는 풍화가 다 되었고, 나의 몸의 고기는 쥐와 송장벌레들이
이미 배불르게 포식하고 난 뒤였을 것입니다.
이로써 이 글의 주제는 첫단락에서 등장하였던 들쥐와 송장벌레로 이어지고 있는,
종결의 <살찐 들쥐>와 송장벌레에서 찾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문학적인 대답은 여러가지가 될수 있습니다.

최련화님이나 김성희님 두분 박사께서 지적하신 대로
현실의 허무주의를 깨고 초월세계를 향하는 작가의 의지가 될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아낸 들쥐와 송장벌레의 출현은 또 다른 해석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을 때에, 병상에서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하여 아득바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왔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불가마속에 들어가 잿가루가 되지 않고
자신을 흙으로 만들어줄수 있는 들쥐와 송장벌레에게다가
자기를 맡기겠다는 것은, 백프로 자연과 하나되어 가고 싶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하여 진정한 우리의 내면이 들여다보이고,
우리의 뿌리속에 스며있는 정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우리 동양의 사상을 보면,
사람과 하늘, 땅이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결코 서구 사조에 맞춘 잣대로서가 아닌, 우리에게 내재하고 있는
스스로의 정서를 담아낸 장집(葬屋)의 주제는 이처럼이나 관념의 세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관념은 형상이 없지만,풍화하고 난 뒤에 해골과,
이 해골의 살점을 뜯어먹고 살찐 들쥐와 송장벌레를 등장시켜냄으로써,
이 수필의 형상화가 만들어졌고, 주제도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심   - 2011/05/05 14:05:42  
어쩌면 이 수필도 신변잡사에서 시작한 수필입니다.
사회부 기자로 있을 때 죽기직전의 에이즈병환자를 방문하고,
그 환자가 죽고나서 자기의 몸이 마음대로 벗겨질가봐 걱정하는
말을 듣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유순호작가님은 이 수필을 신변잡기로 만든 것이 아니고,
문학적으로 창작화시켰고, 나아가 예술화시킨 것입니다.
위에서 이 수필에 대한 창작적분석을 진행하여 본 결과에 의하더라도,
한편의 수필이 진정한 문학수필이 되자면,
반드시 작가의 창작적 변화를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우리의 수필작가님들이 신변잡기도 수필인양,
수필이라는 이름을 달아가면서 거침없이 활개쳐왔던 것은,
수필이라는 이 문학장르가 이론적으로부터
수필이란 손쉽게, 자유롭게, 마음대로 쓸수 있다고 정의하여왔던
<隨筆>이라는 중국문 글자풀이속에 거의 1세기동안이나
갇혀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隨筆>속의 마음대로 자유롭다는 뜻의 <隨>자 한 글자에 빠지고 갇혀서,
우리의 수필문학이 애오라지 신변잡기로 찌들어왔다는것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요.
진심   - 2011/05/05 14:10:02  
이제는 이런 상황이 바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유순호작가님께서 창작하고 계신
창작문예수필들이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간략하여 말씀드린다면, <수필을 창작화시키고, 문학화시키며, 나아가 예술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조선족의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길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남호   - 2011/05/05 14:19:48  
환자가 뇌사상태에 왔을때 의사가 송곳으로 발바닥을 찔러보는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직접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저의 친척가운데 한분이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당직을 서던 의사가 금방 저녁식사를 마치셨던 모양입니다. 손에 이쑤시개를 들고 들어왔던데 그것으로 발을 찔러보고 그럽디다. 제가 직접 눈으로 본것입니다.

하도 생동하게 묘사하였기에 ....
최옥화   - 2011/05/05 14:25:55  
오늘 동성연애자의 수필을 읽었다. 사람이 육체의 시야로 볼땐 부러워 할껏없이 모든걸 다 갖고 있는 사람이였다. 심지어 외모까지.........

하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고 한다.그러던 어느날 살고있는 숙소의 새로 들어온 룸메이트에 맘이 빼앗기기 시작햇고 사랑하는 맘으로 변해버렷다고 한다...............

힘들어하는 글을 남겼고........절때 그런 사랑을하면 않된다는것도 잘 알고있다고 한다.그러나 스스로 빠져나올수 없다고....죽음으로 모든걸 해결할수있으면........그렇게 하고싶다고....
최옥화   - 2011/05/05 14:26:41  



어떻게 생각하는가? 심리변 태?라고 생각하는가???

그럼......술, 담배?그리고 요즘 사람들이 아주 쉽게 범하는 음행은?? 남자라면 이것쯤은 해야된다????

술, 담배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모르는가?

음 욕을 품어 음행을 저질러 얼마나 많은 가정이 깨지는것 모르는가??.........그 결과로 얼마나 많은 애들이 도덕선을 벗어나는가????

사람이 과연 절제할수잇단 말인가?아님........그걸 乐라고 생각하는가?



요즘 내 자신도 사랑앓이를 하였다.왜?아버지가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기때문에.........어느누가??단 ?한사람이라도 성경적으로 말씀으로 말해주지 않았기때문에 ........말씀으로 새 힘을얻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말씀속에서 답안을 찾았다.그리고 내 맘을 들여다 보앗다.이성에대한 사랑에 대한 죄에 묶여있엇다는것을 발견하였다. 이죄를 깨부실수있는건 바로 시험과 시련이고 회복시킬수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성경말씀이다.



무지보다 더 무서운것 없다. 이세상의 풍습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자.진리는 오직하나.....바로 예수그리스도다.

예수를 믿는 사람, 아버지와 인격체로 만나 동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말씀에서 힘을받아 죄를 단호하게 거절할수잇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수잇다.

지금 그 동성연애의 맘을 갖고 힘들어하는 그분께.......예수믿는길 밖엔 다른길이 없다는걸 말해주고 싶다.

가정이 행복하길 원하는가? 이웃과 화목하길원하는가? 자녀들이 잘되길 바라는가?아버지가 맺어주신 인연~~부부가 최소 이세상에서만 서로의지하고 살아가길 바라는가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길 바라는가? 예수를 믿으라~

예수를 믿어야.........깨진 관계, 상처등등 모든것들이 회복될것이다
정예은   - 2011/05/05 15:23:09  
진심님의리플을읽구 배우구 갑니다. 동감합니다.
신지   - 2011/05/05 15:30:39  
유순호 작가님 이글 또 와서 읽었구요. 그리고 그 밑에 길다란 리플들도 다 읽구갑니다.
여기에서는 수필공부도 많이 하는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글 의미가 너무 깊고도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이런 좋은수필입니다.
이것도 문학도 한개 예술이죠? ㅋㅋ 진심님의 말씀처럼

항상 존경합니다. 그리고 너무 멋지십니다. 좋은창작 많이 하시길 바라며 응원합니다 ^^
유작가님 짱입니다 ㅋ
????   - 2011/05/06 00:44:04  
삭제도 예술인것같다.
<<자그마한>>이란 말이 한단락에서 두번 반복된것을 하나는 삭제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에 동의.


밑에 조금더 내려와 <<북받혀 올라 가볍게 흐느끼기 시작했다.>>는 여기서도 <<올라>> 두자는 삭제할수 있지 않은가?

단어 하나하나도 군더더기 없이 만들어보면 어떨가하는 마음에서 의견을 드려봄.

????   - 2011/05/06 00:46:33  
필요한 단어는 꼭 있어야 하겟지만 불필요한 단어는 절대 있지말아야 하고

한마디로 표현될수 있는것을 두마디로 표현하는것도 절대 방지.

<<북받혀 올라...>>에서 <<올라>는 군더더기.

<<북받혀...>>가 이미 <<오른다>>는 내용을 포함했지 않았는지?

????   - 2011/05/06 01:04:12  
마지막 단락에에도 또...

아직도 살아있을 나의 아내나, 아니면 나의 아들한테 .........

여기서도 <<나의>>가 련속 두번 반복되였는데 뒤의 <<나의>>는 불필요한것은 아닌지?

어쩌면 시적운률때문에 두번 반복할 필요가 있기라도 한것인지?

잘 모르겠슴.

안선화   - 2011/05/06 02:33:35  
언제나 흥미진진...내일이 또 기다려지는, 작가님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며 갑니다.
Kel   - 2011/05/06 06:04:22  
재밌게 읽었어요.... ㅋ

지성   - 2011/05/06 10:54:43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도전일 것이라고 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사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성   - 2011/05/06 11:07:39  
이 수필에서 작가는 죽음이라는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지극히나 실존주의적인 작가적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사불성이 되어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것입니다.
현영   - 2011/05/06 13:53:36  
이건 완전 Absurd bizarre !!!!!!! 넘 징그러서 혼났어요 ㅋㅋㅋㅋㅋㅋ
김동찬   - 2011/05/07 04:50:05  
클릭하자마자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죽어서 자연과 하나 된다는 생각을 하면 살았을 때에 보다 자연을 사랑하여야 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귀속처로 자연을 선택한 것은 정말 좋습니다.
갈 때가 되였는데도 구질구질하게 더 살려고 매달리는 모습은 안 좋을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풍장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이대훈   - 2011/05/07 05:32:37  
황동규의 '풍장'과 너무 닮았다.


풍 장 1 - 황동규 -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
이대훈   - 2011/05/07 05:33:02  
이 시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주지적, 허무적, 초월적

◆ 표현 :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 손목에 달아 놓고 → 죽은 모습 그대로, 아무런 꾸밈 없이

* 가죽 가방에 ∼ 통통배에 실어 다오 → 죽어서까지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구속에 대한 풍자와 비판

* 검색 → 군사독재로 지칭되는 시대상황 상징

* 곰소 → 시대상황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인간의 자취가 드문 지명

* 무인도 → 화자가 육신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지향점

* 벗기우고 → 주체 : 비바람, 햇빛

*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 시간과의 단절, 세상과의 이별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간의 경과를 암시함.

* 살을 말리게 해다오 →육신의 모든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화자의 소망

* 화장도 해탈도 없이 →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죽음이 세속적인 가식으로도, 신성한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 자신의 존재가 비바람 속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 주제 : 자유에로의 귀환 의지

존재의 소멸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

◆ 풍장 → 시체를 한데에 내 버려두어 비바람에 없어지게 하는 장례 풍속의 한 가지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풍장의 준비

◆ 2연 : 풍장의 과정

◆ 3연 : 풍장의 의미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황동규의 1980년대 시세계를 대표하는 연작시 <풍장>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완벽한 자유에로의 귀환의지와 투신에의 갈망이 상징적인 표현 가운데 선명하게 요약되어 있어 주목을 환기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그저 담담함이다. 죽음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바람'과 '죽음'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일상의 고달픔과 질곡을 벗어나 정신의 가벼움과 투명함을 성취하는 동시에 영원한 이상 세계인 '무인도'에 도달하여 무한한 자연에로 귀환하려는 의지가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이다.

시적 자아는 풍장을 시적 상황으로 설정하여 자신이 죽을 경우 풍장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시간의 경과에 따른 풍장의 과정을 담담하고 비장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시적 자아가 이러한 풍장을 염원하는 것에서 현실에 대한 시인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바람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서 제시된다. 여기에서 바람은 살과 피를 말리우듯 일체의 사물을 소멸시켜 자연의 일부로 되돌리는 생명 순환의 원리를 상징한다. 결국, 이러한 죽음마저 그 어떤 세속적 가식이나 신성한 의미도 거부한 채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함께 논다는 것에서 허무에 바탕을 둔 시인의 현실 인식과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죽음은 단지 자연과 우주의 무한한 순환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슬퍼할 것도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거기에다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서 신비화하거나 신성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상식을 뛰어 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죽음관과 죽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와 어조는 우리 시의 전통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삶에 대한 세속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삶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대훈   - 2011/05/07 05:34:50  
황동규 시인의 '풍장'과 유순호 조선족 작가의 장집(葬屋)이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어디가 다른지는 진심씨의 리플에서 읽는다.



여기서 들쥐와 송장벌레가 나옵니다.
이 수필의 시작 때에 이미 한번 나왔던 것입니다.

-잡초더미속으로 들쥐가 나들고, 송장벌레가 무리지어 다녀도 좋다.
(첫 단락, 세번째 줄)

이런 구절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이론에서 복선(伏線)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미리 짐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겟습니까.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미리 그 사건의 가능성을 암시해 두는 것과 같은 도리입니다.
잡초더미속에 뱀이 나올수도 있고, 잠자리가 날아다닐수도 있고,
별의별 이상한 벌레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쥐와 송장벌레이겠습니까.
바로 쥐와 송장벌레는 시신을 해부하여 흙으로 만들어버리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시신 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우연하게 죽어있는
여타 동물들의 시체도 해볓아래서 썩어(풍화)가고 있을 때면,
항상 그 시체에는 쥐와 송장벌레들이 매여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연의 청소부로 불리기도 하는 그런 유익한 동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서두에서 굳이 이 두 동물의 이름을 미리 꺼냈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결말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동물의 기능을 위하여,
복선을 깔아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들쥐와 송장벌레가 나타날 때,
이 들쥐가 처음에 나타날 때와 다른 것은 <살찐 들쥐>라는 것이고,
처음에 나타날 때는 그냥 잡초더미속에서 나드는 들쥐였는데,
마지막에 나타날 때는 풍화가 된 해골의 눈구멍안에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나는 풍화가 다 되었고, 나의 몸의 고기는 쥐와 송장벌레들이
이미 배불르게 포식하고 난 뒤였을 것입니다.
이로써 이 글의 주제는 첫단락에서 등장하였던 들쥐와 송장벌레로 이어지고 있는,
종결의 <살찐 들쥐>와 송장벌레에서 찾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문학적인 대답은 여러가지가 될수 있습니다.

최련화님이나 김성희님 두분 박사께서 지적하신 대로
현실의 허무주의를 깨고 초월세계를 향하는 작가의 의지가 될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아낸 들쥐와 송장벌레의 출현은 또 다른 해석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죽을 때가 되었을 때에, 병상에서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하여 아득바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왔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불가마속에 들어가 잿가루가 되지 않고
자신을 흙으로 만들어줄수 있는 들쥐와 송장벌레에게다가
자기를 맡기겠다는 것은, 백프로 자연과 하나되어 가고 싶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하여 진정한 우리의 내면이 들여다보이고,
우리의 뿌리속에 스며있는 정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우리 동양의 사상을 보면,
사람과 하늘, 땅이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결코 서구 사조에 맞춘 잣대로서가 아닌, 우리에게 내재하고 있는
스스로의 정서를 담아낸 장집(葬屋)의 주제는 이처럼이나 관념의 세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관념은 형상이 없지만,풍화하고 난 뒤에 해골과,
이 해골의 살점을 뜯어먹고 살찐 들쥐와 송장벌레를 등장시켜냄으로써,
이 수필의 형상화가 만들어졌고, 주제도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대훈   - 2011/05/07 06:03:53  
[지성님의 견해]

지성 - 2011/05/06 11:07:39


이 수필에서 작가는 죽음이라는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지극히나 실존주의적인 작가적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사불성이 되어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무의미한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것입니다.
이대훈   - 2011/05/07 06:16:36  
황동규의 '풍장'은 허무주의 심경에서 머물러있으나 유순호작가의 '장집'은 허무주의를 깨버린데 있습니다.
이 것이 이 수필의 시도한바라고 봅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입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입니다.
허무주의(虛無主義)는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니힐)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사상적 입장입니다.
이 허무주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니체입니다. 반대로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까뮈입니다.
니힐리즘은 신을 부정하지만 실존주의는 부정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신에게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것입니다. 이 수필에서의 '나'는 결코 종교나 또는 신의 어떤 영적인 힘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고로 죽음을 예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장집(葬屋)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 죽음에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shanghaitan   - 2011/05/07 14:24:40  
댓글 평론을 통하여 이 수필의 진가에 대하여 잘 알게 된것 같습니다.
이런 수필은 참으로 유순호작가님 말고는 누가 또 쓸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읽다보니 솔직히 가슴이 섬뜩합니다.
美丽心境   - 2011/05/07 22:04:57  
어쩐지 너무 쓸쓸하고 슬퍼보여요.
그렇게 죽으면 너무 고독할것이 아닌가요?
美丽心境   - 2011/05/07 22:05:56  
힘내셋요
최련화   - 2011/05/07 23:11:49  
황동규시인님의 '풍장'과 유선생님의 '장집'은 본질적으로도 다른데가 있어요.
'풍장'은 첫 구절부터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남한테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하잖아요.
그러나 유선생님의 '장집'은 남들은 아무도 모르게 자기절로 장집을 만들고,
자기의 죽음을 남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아요.
죽은 뒤에, 3년 쯤 지나서 편지가 한통 가닿게 하려고 하거든요.
이 것이 이 두 작품의 본질의 구별점이 아닐가요?
청설   - 2011/05/08 00:23:54  
김성희님, ????님 등 분들의 지적에 감사합니다.
첫번째 단락에서 '자그마한'이라는 단어가 두번 반복된 것을 하나 지워버렸습니다.
두번째 단락에서 '북받혀 올라'의 '올라'도 지워버렸습니다.
군더더기를 없애버리는 것은 짧은 편폭의 글에서 더욱 주요합니다.
삭제의 예술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글은 끝없이 다듬지 않으면 안됩니다.
최련화   - 2011/05/08 00:26:39  
수필은 참으로 여느 장르의 문학보다도 더욱 기교와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을 실감케합니다.
중복되는 단어는 그외에도 들쥐와 송장벌레가 나오지만,
첫번 단락에서는 그것이 복선으로 깔려있는 것이었네요. 마감 단락에서는 그 복선에 대하여 반증이라고 해야 하는가요..
최련화   - 2011/05/08 00:30:40  
지금까지 읽은 수필작품들 가운데서 이번 수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가장 오래동안 머리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에요..

마지막 단락: 적어도 한 3년 쯤 뒤에, 내가 스스로 장집 안에 들어가 나의 시신을 들쥐와 송장벌레들에게 모조리 먹히고 난 뒤에, 아직도 살아있을 나의 아내나, 아니면 나의 아들한테 편지가 한통 가닿게 할 것이다. 내가 풍화되어 있는 장집 주소를 알려주고, 올 때 대나무 칼을 갖고 와서, 행여나 육탈이 되지 않은 나의 뼈다귀가 있으면 깔끔하게, 말쑥하게 치토 하라고 말이다.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고 한마디 할 것이다
Sk 투어   - 2011/05/08 02:38:12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본 적은 많지만 이런 식의 처음입니다.
때로는 장기 기부를 할가는 생각도 가끔 하기도 합니다.
화장하여 산이나 강에 뿌려 잘라가며 할가?
그런데 병상에서 인사불성이 되여 그렇게 모자람을 겪다가 결국 죽어가는것은
정말 싫습니다.

풍장....
수현   - 2011/05/08 07:58:36  
저는 문학을 잘 몰라서 이글을 읽은뒤에 내가 받은 그 느낌을 말 할려면
사람이란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글을 이렇게 써내신 작가님이 이런 글을 생각해 내신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이렇게 비관하게 생각하지말라고 말해야 할건지 지금 지금 기억이 있고 생각할수있고 이 생활을 즐길수있을때 즐기고 이후에 일은 이후에 맞기는편이 좋지않은가고 전 생각해 봅았어요


좋은 수필임을 알수있지만,
힘내세요~

그리고 우리 다같이 화이팅해요 ~
李海燕   - 2011/05/08 08:58:08  
ㅎㅎ 아저씨 이제야 들어와서 글을 읽어보았슴다 ^^ 미안 ......
이전에 쓴것도 몇편 더 읽어봤습니다 . 정말 글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이야기에 흡사한 글으 보면서 진짜 내가 학교서 쓴글과는 완연히 다른 대비되는 느낌으 받았씀다
다른 사람은 몰라두 나누 아저씨 글으 읽으면서 아저씨 글에는 뭔가가 사람을 끄는 그런 매력이 있는것같씀다 . 그것두 글쓰는 일종 비결이겼쬬?! 아니면 사람 성격차인가?..... 암튼 아저씨 한테는 그런 기교를 배우고 싶습니다
앞으로 아저씨 글을 자주 읽으면서 배우 겠습니다
시향   - 2011/05/08 12:00:05  
아무리 수필이 건실한 의미를 갖추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의미적양상이 없다고나 할가 아님 호르몬 안 바란스를 이루없다고나 할가.
죽음을 앞두고 다 같이 고민을 해보는 일을 이처럼 글로 펼쳐보임도
때론 자극을 주는것에 잠간은 흡족을 가진다.
간만에 들려서 배움의 자세로 종종으로 읽다가 또 읽다가...
????   - 2011/05/08 12:07:10  
시향선생 ㅋㅋ

내가 한글 리해능력이 차한탓인지 모르겠소만.. ㅋ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아먹지 못하겠으니.



????   - 2011/05/08 12:08:29  
아무리 수필이 건실한 의미를 갖추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의미적양상이 없다고나 할가 아님 호르몬 안 바란스를 이루없다고나 할가.
죽음을 앞두고 다 같이 고민을 해보는 일을 이처럼 글로 펼쳐보임도
때론 자극을 주는것에 잠간은 흡족을 가진다.
간만에 들려서 배움의 자세로 종종으로 읽다가 또 읽다가...

무슨 말뜻인지 좀 풀어서 말씀해주실수는 없습니까?

의미적 양상이라는것은 무슨 말?

호르몬 안 바란스라는것은 또 무슨 말인지?

부탁합니다.
김철범   - 2011/05/08 12:38:12  
이런걸 글이라고 하지 ,,요즘 정말 조선족문단에서 글같지 않은 장난 글들 재롱 글자들이 정말 지겨움
조선족작가량반들 글자가지고 재롱떨지말고 장난하지 말아야하는데.. ㅠㅠㅠ
진짜 이렇게까지 글에다가 자기 령혼같은 이야기 담을수있다는것이 ... 참 부럽다
lili   - 2011/05/08 13:56:32  
진심님의 플속에 뜬 <신변잡기>란 말에 한마디 하고 싶어지네요. 저는 신변잡기가 결코 나쁜건 아니라고 보고 있어요. 한 사회에 몸을 담고 살아가면서 그 사회의 영향을 안받는다는건 좀 이상한 얘기 아닐가 싶네요. 주요한건 글쓰는 이의 수준이라고 봐요. 똑같은 신변잡기를 쓰면서 어떻게 독자들이 흥미가지고 읽게하고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주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속에서 자신의 삶에 좋은 방향이 될수있는 교훈이나 그 어떤 도리같은걸 깨칠수 있다는것 그 무엇보다 중요한것 아닐가 싶네요.

유선생님의 글은 아주 예술적이라고 봐요. 하여 늘 읽는이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공간과 여운을 남겨줌에 더불어 읽는이들의 각자의 삶의 존재를 다시 돌아보게 하여서 특히 좋다고 봐요. 하지만 세상 모든 글쓰는 이들에게 유선생님과 꼭같은 필체를 요구하는건 무리가 아닐가 싶네요.

좋은 수필에 대한 정의는 글쓰는 이가 내리는것이 아니고 독자들이 내리는것이 아닐가 싶네요. 독자들이 좋아하는 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줄수있는 글이라면 신변잡기 인들 어떠할가요....
빈술잔   - 2011/05/09 15:45:22  
유작가님의 새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수필공부 잘해보는 시간이 되여서 감사합니다.
글 읽기전 귀띰한것처럼 그런 공포적인 글은 아닌데요..
리플에 여러 선생님들의 글 평이 있어서 다각도로 이 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얼마전 다른 글에서의 진심님의 댓글, 명수필, 그리고 오늘 유작가님의 이 글을 읽고나서 수필의 정의에 대해 한층 깊게 느껴보게 되였습니다.
빈술잔   - 2011/05/09 15:52:42  
수필이라는 이 장르가 참 좋다고 생각됩니다.
시는 짧아야 하므로 고도의 함축성이 필요하여 완전히 시인이 시를 쓸때의 경지에 들어가기가 만만찮고
소설은 내용이 풍부하여 느긋하게 읽는 멋이 있지만 이야기 줄거리가 만만찮은 편폭을 차지하지만
수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편폭에 뭔가 전체 글을 관통하는 사상을 재치있게 넣을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빈술잔   - 2011/05/09 16:00:40  
제가 하나 알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수필 隨筆>과 <산문 散文>의 정의에 대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느분이 말씀해주실수 있는지요?
유작가님이나 김성희님, 김경훈님, 최련화님, 진심님, ... 여러 선생님들의 가르침 말씀 듣고싶습니다.
진심   - 2011/05/10 13:04:53  
이 질문은 좀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인것 같습니다.
수필과 산문은 서로 다른 장르의 문학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문이란 이름은 포괄적인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보통 운문과 산문으로 나뉘는데 운문은 시를 말합니다.
즉 율격에 억매인 글을 운문이라하고 율격에 억매이지 않은 글을 산문이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들이 산문인것입니다.
즉 수필도 산문속의 한 장르에 속한다는것입니다.
생소한 말 같지만 소설이나 희곡도 역시 산문에 속합니다.
진심   - 2011/05/10 13:05:33  
문학명사해석은 이렇습니다.
산문이란? 율격과 같은 외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쓴 글. 소설, 수필 따위이다.
진심   - 2011/05/10 13:07:20  
아래는 인터넷상의 펌 글입니다.
산문이란 무엇인가 검색하니 여러 해답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중에서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한 글인것 같아 퍼왔습니다.
유익한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산문이란 일반적으로 운문과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운율(韻律)이나 음절의 수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의 글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같은 개념은 서구로부터 들어온 개념으로 문학형식을 운문과 산문의 두 가지로 구분할 때에 적합한 것이다. 중국 고대 문학 중의 산문은 이와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중국 고대문학에서의 산문이란 말은 변문(騈文)과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생겨났다.

이른바 변문이란 반드시 운율을 맞추어 쓰지는 않으나 형식적인 미(美)를 매우 중시하는 글이다. 즉 한 구를 4자나 6자로 하여 글자 수를 맞추고 또 두 구씩 대구를 이룬다. 또한 전고(典故)라고 하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 어휘를 즐겨 사용한다.

이렇듯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극도로 추구하는 변문은 기실 운문의 요소를 적잖게 지닌다. 이런 변문의 출현은 중국 고대문학의 독특한 일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글에서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은 잘 표현할 수 있으나 내용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또 그 내용의 전달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형식미 위주의 글과 상대적인 글로서 산문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산문은 우선 시가를 대표로 하는 운문과 상대적인 글, 즉 운이 없는 글을 의미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대구(對句)를 비롯한 여러 가지 형식미 위주의 글과 달리 내용을 위주로 한 자유로운 형식의 글을 가리킨다. 이 고대문학에서 말하는 산문은 경전(經傳: 경서와 경서를 주해한 책)과 사서(史書)를 비롯하여 사상과 감정을 담은, 형식이 자유로운 여러 형태의 글들을 가리키며 흔히 고문(古文)이라 불린다. 다만 오늘날에 이르러 산문은 시가, 소설, 희극 등과 더불어 일종의 문학 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운율이나 대구와 같은 형식미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의 단편 문장을 의미한다.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여 의론과 서사 및 서정 어느 것도 가능하다.

진심   - 2011/05/10 13:29:13  
lili님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lili님의 말씀: 좋은 수필에 대한 정의는 글쓰는 이가 내리는것이 아니고 독자들이 내리는것이 아닐가 싶네요. 독자들이 좋아하는 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줄수있는 글이라면 신변잡기 인들 어떠할가요....

이에 대한 저의 대답: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자면 신변잡사를 신변잡기가 아닌 독자들의 이야기로, 독자들이 공감할수 있는 이야기로, 그러자면 독자들의 공동의 관심사로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체험을 고지고지 그대로 쓰는것이 아니고 그것을 창작화시킨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렇게 되였을때는 이미 신변잡기가 아닙니다. 때문에 현대수필리론에서는 수필을 가리켜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다]고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것입니다.

실례를 하나 들어드리도록 하지요.

이야기속의 주인공인 [나]라는 여자가 아이를 하나 키우고 있는데, 이 아이가 자라면서 심술만 부리고 욕심만 부리고, 자기 배만 채우면 그만인, 한마디로 말씀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돼지]입니다. 실제로 [나]가 겪고 있는 사실이며, [나]에게는 확실히 이런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 이 아이를 착하고 부드럽고 욕심도 부리지 않고 남도 배려할줄 알고, 또 사랑할줄도 아는 어린이로 교육하여냈습니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가르침, 방법, 등 가능한 노력을 다 하였을것입니다.

이를테면 선생님이 타일르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와서 일깨워주고, 부모님이 번마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 하면서 가르쳤을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서 확실히 [욕심돼지]인 그 아이를 교육하여 냈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가지고 자신의 실제 겪은 일을 경험담삼아 수필로 썼습니다. [나는 실제 사실을 썼는데]하고 주장하여도 독자들은 읽고 나서 그것을 믿어주지 않을것입니다. 혹시 [나]의 아이는 그렇게 교육하여 변화하여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생활속의 아이들은 그런 교육으로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서이겠습니까? [나]는 자신의 실제 생활속의 이야기를, 말하자면 신변잡사를 그대로 신변잡기화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럴 때 [나]가 실제로는 아이가 하나밖에 없고, 확실히 선생님과 함께 손을 잡고 인내심있는 타이름과 가르침만으로 아이를 변화시켜낸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쓰지 않고, [입술이 닳도록 가르치고 타일르고 해도 좀처럼 변화가 없던 이 욕심돼지가 변화하게 된 원인]을 다른데서 찾아야 합니다. 즉 자기의 실제 이야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보편화된 실제 경험에서 찾는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남]들은 아이가 하나 뿐일 때 그렇게 [욕심돼지]이고 자기밖에 모르던것이, 두번째 아이를 낳고나자 첫번째 아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여 버린것입니다. [형], 또는 [언니]로 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밖에 모르던 욕심을 버리고 동생을 생각하고 걱정하면서 철이 들고 셈이 들더라는것입니다.

때문에 이럴때 [나]는 확실히 자기는 아이 하나 뿐이고, 두번째 아이를 낳지 않고서도 오직 말로써 교육으로써 아이를 변화시킨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그렇게 해서 끝까지 교육하여 냈노라고 고집하면 안됩니다. 남들은 읽고나서 거짓말이라고 웃게 됩니다. 혹은 [나는 하늘에 맹세컨데 진짜 사실 그대로이다.]고 선서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 사실 맞다.]고 인정해줄지는 모르지만, [그건 너 혼자만의 특별한 사정이겠지. 우리는 아니다.]하고 외면하게 될것입니다.
진심   - 2011/05/10 13:33:44  
[나]는 하나뿐인 아이를 하나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두번째 아이를 낳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때의 [나]의 두번째 아이는,
[나]의 아이가 아닌, 남들의 실제 생활속의 두번째 아이가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신변잡기가 창작화되는 과정입니다.
아이가 하나뿐이었던 나의 이야기가, 아이가 둘 셋을 낳은 남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되는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욕심돼지가 두번째 아이를 낳았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들어버리고 셈이 들더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끄떡이게 될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창작화하여 남의 이야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한데 이어가는것이 바로 신변잡사를 신변잡기로 만들지 않고 그것을 창작화하여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것입니다.
진심   - 2011/05/10 13:39:24  
실제로 lili 님도 리플속에서 이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신변잡기를 쓰면서 어떻게 독자들이 흥미가지고 읽게하고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주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속에서 자신의 삶에 좋은 방향이 될수있는 교훈이나 그 어떤 도리같은걸 깨칠수 있다는것 그 무엇보다 중요한것 아닐가 싶네요...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독자들이 흥미가지고 읽게 하고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주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나아가서...] 이 말씀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신변잡사를 신변잡기로 만들지 말고 창작화하고 문학화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리해하고 싶습니다. 신변잡사를 고지고지 그대로 신변잡기로 만들면 도저히 남을 감동줄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자기 혼자서 할때는 남들이 간혹 신기하고 희한한 이야기에 놀라 [이런 일도 다 있었구나] 혹은 [와, 그랬구나]하고 감탄하고 환성을 지를수는 있어도 감동을 받을수 있을지는 알수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감동을 받을수 있는것은 꼭 감동을 받게 되는 인간의 내면적인 감정을 자극할수 있는 이야기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공감대를 만드는것입니다.

이상 답이 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의문이 있다면 더 제출하여도 됩니다. 생각나는대로 함께 공부합시다.

이미   - 2011/05/10 14:53:10  
와~~ 공부를 많이 하고 갑니다 ~
니카 대단합니다~!
수현   - 2011/05/10 21:52:17  
저두 진심님의 리플을 읽구 좋은 공부를 배우구가요~
빈술잔   - 2011/05/10 22:06:23  
진심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도 대답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저도 예전에 나름대로 검색을 해보았는데, 수필뿐이 아니라 소설 등도 산문에 속한다는것에는 좀 뜻밖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니카에 물음을 던져보았습니다.
역시, 산문이란 이런것이였군요. 영역이 넓은것이였엇네요.

좀 우습게 들릴지는 몰라도
저는 지금까지 산문은 소설/희곡..과는 판판 다르면서 수필과 비슷한 장르에 속하는것인줄로 알고있었습니다.
수필은 담담하게 그 어떤 사상을 표달해내는것에 비해 수필보다는 좀 더 "서정적인" 장르가 산문인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산문이란 문체에 대해 애매한것이 좀 있는거 같습니다.
한국에서 말하는 산문과 중국 현대문학에서 말하는 산문이 좀 다른거 같다는겁니다.

제가 지난해에 서점에서 한번에 <2009中國隨筆排行榜>과 <2009中國散文排行榜>이라는 책 두권을 사서 시간나는대로 읽어봤습니다마는, <2009中國散文排行榜>에 나오는 글이 그 어느 한편도 소설이나 희곡/시..라는 장르쪽으로 기울어진걸 못봤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나>를 기본(혹은 중심)으로 흘러나온 신변잡사? 였습니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작가들의 글들은 신변잡기가 아닌 그 어떤 재치와 여운을 보여주는 의미깊은 글들이였습니다. 그리고 <2009中國隨筆排行榜>의 수필보다는 뭔가 글속에 서정이 많이 흐르는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뭔가 수필의 잣대안으로 들어온 글들은 <2009中國隨筆排行榜>이란 책에 담았고
그 외에 잡동사니 글들을 아예 <2009中國散文排行榜>이란 책에 무더기로 처리를 해버린것이였을가요...

산문에 대해 아직도 좀 아리까리 합니다.
나나   - 2011/05/10 23:34:36  
글쓰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진심   - 2011/05/11 03:39:17  
빈술잔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빈술잔님께서 하신 말씀속에 [좀 우습게 들릴지는 몰라도저는 지금까지 산문은 소설/희곡..과는 판판 다르면서 수필과 비슷한 장르에 속하는것인줄로 알고있었습니다.수필은 담담하게 그 어떤 사상을 표달해내는것에 비해 수필보다는 좀 더 "서정적인" 장르가 산문인줄로 알았습니다.]라는 말씀말입니다.
제가 유순호선생님께 물었더니 유선생님도 거의 비슷하게 대답합디다. 산문시라는 말은 있어도 수필시라는 말은 못 들어봤다고 그럽디다.
어쩌면 이것은 중국어로 된 문학명칭에 대한 어폐가 아닌가 싶습니다.
산문이라고 하면 좀 더 포괄적이고 좀 더 수준높은 쪽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산문이라고 부르는 이름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수필이라고는 하지않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유선생님을 통하여 문학수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창작문예수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것을 저도 최근에야 알았던 일입니다.
저는 산문이라고 하면 영어권 나라에서 에세이라고 부르는것과 같은 도리일것이라고 봅니다.
진심   - 2011/05/11 03:43:30  
저는 미국에 유학온지 벌써 5년 됩니다.
처음에 아르바이트를 찾으러 미국 가게들에 갔더니 사장이 나보고 에세이를 바치라고 그럽디다.
우리는 보통 리력서를 바치라고 그러지 않고 무엇입니까.
리력서외에도 에세이를 써보여야하는데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는
미국에 대하여, 미국의 사회와 정치 문화에 대하여,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적어서 바치라는것입니다.
미국의 웬간한 회사들에 취직하자면 리력서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반드시 회사에서 요구하는 에세이를 바쳐야합니다.
에세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고있는 에세이는 서구적인 수필 또는 산문을 말합니다.
반대로 산문이라고 하면 한국적인 에세이라고 해도 되지않을가요?


진심   - 2011/05/11 03:54:41  
미국에 와보니 미국 사람들은 웬간한 회사 직원이나 간부쯤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에세이를 기가막히게 잘 씁니다.
그분들이 쓴 에세이를 읽어보면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웬간한 작가들도 뺨을 칠 수준입니다.
그만큼이나 미국에서는 대학에 입학하기전까지 리과반이니 문과반이니 하고 나누지 않습니다.
거의 문과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에세이를 잘 쓰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근본적으로 대학에 붙기도 어렵거니와 대학을 졸업한뒤에는 취직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미국으로 유학하기 위하여 영어 토플을 시험보는데 토플도 바로 영어 작문입니다.
영어로 작문관을 넘지못하면 우선 먼저 대학에 입학부터 하지 못합니다.
토플 작문도 에세이라 부르고 회사에 취직원서를 낼 때도 리력서외에 또 바쳐야 하는
자기 소개서를 에세이라고 부릅니다.
전문 작가나 목사 등이 쓰는 글들도 역시 에세이라고 부르고 신문사에 전문 기자들이 칼럼을 쓸 때도
그것을 모조리 에세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저는 [서구적 수필]을 에세이라 부르고 [한국적 에세이]를 산문이라고 부르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리론적으로 정의된것은 없습니다.
글을 크게 운문과 산문으로 나뉠때는 율결을 갖춘것을 시라하고 율격을 갖추지 않은 그외에 글들을
통털어 산문이라고 부르지만, 소설이나 희곡과 같이 산문류에 속하지만 그 장르자신의
법칙과 규률, 기교 등에 의하여 거의 문학 자체의 주선을 이루고 있는 소설이나 영화같은 문학작품은
산문이라 한데 통칭하지 않고 특별히 소설이라고 부르고 희곡이라고 부르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테면 서구에서 한데 통칭하여 에세이라고 부르면서도 신문에 전문 페이지를 만들고 고정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에세이에 대하여서는 그것을 전문 칼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국말로는 [專欄]이란 뜻입니다. 즉 [전문란목]이란 뜻입니다.
[전문란목]이니 [전문란목]으로 불러주는것이 독자들한테 더 자세하고 명백하여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설이나 희곡도 더 자세하게 명백하게 특정된 이름을 따로 불러주는것이 더 좋은것입니다.

진심   - 2011/05/11 04:00:02  
어떤때보면 수필을 시처럼 쓴것들도 있습니다. 율격은 시처럼 엄격하지않지만 분명 시처럼 쓰는 수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산문시라고 불러줍니다. 수필이라고 썼는데 소설 같기도 하고 정작 소설 기준으로 보자면 또 소설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필로 봐주기에는 너무 소설 비슷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유순호선생의 [앨마샌즈의 이야기]가 그런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제목에 [이야기]라는 글자가 들어있으니 이야기이겠지만 고전 이야기도 아니고 현대이야기도 아니고 우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환상도 아니니 이럴때 통털어 산문이라고 불러버릴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좀 리해가 되지않는것은 유선생님은 그것을 [창작문예수필]이라고 주장합니다.
서구적인 에세이와 한국적인 수필이 부딪치면서 태여난 새로운 형태의 문학수필이라는 주장입니다.
일단 저도 이런 주장에 동의를 표시한바 있습니다.
진심   - 2011/05/11 04:03:19  
설명하면 할수록 점점 복잡하게 꼬여드는것 같습니다.
만약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글로 산문과 에세이를 비교할 때 ......
산문이란 [한국적인 에세이]고, 에세이란 [서구적인 산문]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함께 의논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조연희   - 2011/05/11 07:39:36  
산문이란 한국적 에세이, 에세이란 서구적 산문? 이렇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요?

조연희   - 2011/05/11 07:54:10  
곧이어 산소호흡기도 떼어 내고 링게르도 걷어갈 것이다.







링게르---링거로 고치면 어떻겠는지 해서 한마디 올려봅니다.
의학자 시드니 링거(Sydney Ringer)의 이름으로 명명된 주사를 한국식 영어발음으로 렝게르라고 하지 않고 링거라고 부르는 같아요.
한번 확인하여 주시고 저의 건의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알려주세요.^^

선생님의 수필 너무 좋습니다...
청설   - 2011/05/11 08:10:58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방금 다시 읽어보면서 다시 단어들을 다듬었습니다.
물론 링게르도 링거로 고쳤습니다.
'뙤창구멍도 한 두개쯤'을 그냥 '뙤창'으로 고쳤습니다.
뙤창구멍에서 '구멍'도 군더더기입니다.
'한 두개'도 필요없는 설명입니다.
이미 '바람이 두골로 들어와서 족골로 빠져나게끔'이라는 말이 있으니
뙤창이 분명 앞 뒤에 하나씩, 두개는 나있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히 풍화할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요즘 갑작스럽게 생겨난 나 꿈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뒤에 구절은 불필요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내가 완전히 풍화할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만들겠다.'
이렇게 고쳤습니다.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고 한마디 할 것이다.'에서도
'한마디 할 것이다'는 쓸데없는 군더더로 보입니다.
여기서도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겠다.'로 고쳤습니다.
이렇게 그냥 '잊지 않겠다'고 고치면 훨씬 더 깔끔하게 끝나버릴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의 마지막 구절 -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내가 완전히 풍화할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만들겠다.
네 번째 단락에서의 마지막 구절 -
환자는 비로소 눈빛을 반짝이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뒤의 일은 모른다.
그리고 마감 단락에서의 -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절대 그것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부탁도 잊지않겠다.
이런 언(言)투와 서로 맞물리기 때문에 어감에도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문제점을 지적하여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김성희   - 2011/05/11 09:37:41  
아주 짧게 씌어진수필이지만..
서정적 심리 묘사, 인간 운명에 대한 유머 감각, 다의적 언어 구사, 정교한 구성 등이
너무나도 잘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빈술잔   - 2011/05/11 10:00:49  
진심님,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심님은 대체 무슨 전공인지 좀 알려줄수 있는가요? 문학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은거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 요청말씀 드립니다.
니카시단에 "변화"에 대해 진심님이 보시는 시각과 느낌을 알고싶습니다.
감히 글평을 부탁해도 될가요?
"변화"는 나름대로 그 어떤 사실을 배경으로 저 자신의 심경토로에 의하여 흘러나온 시입니다마는
다른 사람들은 이 시에 대하여 어떻게 느껴질가 아주 궁금해납니다.
독자들이 읽을때 제가 시를 쓸때의 경지와 비슷하게 느껴오는것일가? 정말로 왕궁금입니다.

????   - 2011/05/11 13:17:40  
송장벌레





숲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산길을 다니면서 죽은 쥐나 새의 시체를 본적이 있는가? 실제로 많은 수가 죽어갈텐데 이들의 사체를 우연히 마주친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들은 어디 비밀스런 공간에 모여 죽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주검들을 염하여 묻어주는 장례에 관한 일을 도맡는 이들이 있듯이 자연계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해 주는 생명체들이 있다. 특히, 많은 곤충 종들이 동식물의 죽고 순환하는 과정에 관여한다. 식물의 주검인 낙엽이나 떨어진 가지를 땅위에서는 톡토기 등이, 물 속에서는 날도래 등이 미세한 조각으로 분해한다. 또한 썩어가는 나무의 몸통은 흰개미나 바퀴 등이 셀룰로즈를 분해한다. 마찬가지로 동물이 죽고나면,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송장벌레, 반날개, 파리 등 다양한 곤충이 모여든다. 그리고 썩어가는 동물질을 분해하여 숲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이런 과정들은 숲에서 매일 이루어지지만, 우리들은 거의 눈치도 못챈 채 살아간다.

왜 송장벌레인가?




자연계의 청소부 역할을 담당하는 곤충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곤충은 '송장벌레'란 독특한 이름을 가진 무리이다. 이름속에 송장 어쩌구하는 말 때문에 괜시리 눈을 찡그리며 징그러움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들이 자연에서 죽어간 쥐나 작은 새들의 사체를 치워주는 훌륭한 곤충이다. 시체를 치워주는 방식에는 무리마다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유명하게 된 이유에는 송장벌레속(Nicrophorus)에 속하는 종들의 특별난 생태 때문이다. 이들은 쥐나 새의 시체가 발생되면, 더듬이 끝의 넓게 확장된 부분을 통하여 즉시 냄새를 맡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만일 수컷이 먼저 발견을 하였다고 하면 암컷이 빨리 오도록 하기 위하여 시체 위에 올라서 특별한 자세를 잡고 암컷을 유혹하는 페르몬 향수를 뿌려댄다. 왜냐하면 이들은 암수가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새끼가될 알을 놓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알로부터 새끼들이 커가는 과정을 돌보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동물의 시체는 자신의 자손이 먹을 식량원인 셈이다. 따라서 시체를 흙이나 낙엽등으로 묻는 매우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만일 시체가 놓여진 위치가 땅파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 하면 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적합한 공간으로 옮겨놓기도 한다. 묻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이들은 시체의 털이나 깃털 등을 뽑아내는 단계를 거친다. 이 때, 자신의 배끝에서 나오는 특수한 방부물질로 털뽑을 자리를 발라대어 시체가 썩는 시간을 지연시키도록 애을 쓴다. 그리고 나서 사체의 밑으로 들어가 아래쪽 흙을 파올려 쥐를 흙속으로 내려오게하면서 퍼올려진 흙으로 덮어간다. 마침내 사체는 지하로 내려가고 교묘하게 흙이나 낙엽등으로 덮힌 무덤이 완성된다. 그리고는 덮은 표현에 자신들의 알을 낳아서 새끼가 되면 바로 아래의 사체를 먹게 한다. 즉, 무덤이 바로 애벌레들의 먹이 저장고인 것이다. 어째든 우리들의 눈에는 쥐나 새들의 징거운 사체를 볼 수 있지 않아서 좋다. 따라서 이들은 이름 그대로 송장을 취급하는 곤충인 송장벌레인 셈이며 프랑스의 파브르란 곤충학자도 이 곤충에게 "위생장관"이란 호칭을 주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들

이 곤충의 이름은 남과 북이 모두 같이 '송장벌레'라고 같이 쓴다. 아마도 북한에서도 이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반면에 한자어로 이들의 이름은 매장충(埋葬蟲)이라고 부른다. 즉, 시체를 묻어주는 역할을 그대로 표현한 셈인데, 비슷한 맥락으로 영어권에서는 주로 부르는 이름도 있지만 별칭으로 베링비틀즈(Burying Beetles)라고 하여 한자어와 같은 뜻의 이름도 있다. 이보다 주로 쓰는 영어 이름은 캐리언비틀스(carrion beetles)로서 썩은 고기 또는 사체를 먹는 딱정벌레란 뜻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중국, 서양 등 대부분의 이름들이 그 곤충이 가지는 생태를 반영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장벌레의 부언

송장벌레는 송장벌레과(Silphidae)의 대표명칭으로 우리나라에는 27종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송장벌레과의 곤충은 북반부에 걸쳐 주로 분포하지 남반부의 열대지역에는 적응된 종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무리이다. 비록 이름은 송장벌레이지만 이들 모두가 시체를 파뭍는 습성과 모성본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아주 적은 종수이지만, 일부는 식물을 먹고 정원의 해충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죽은 동물의 잔해를 먹으므로 적절한 이름이라 판단된다

김기림   - 2011/05/14 04:47:05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 선택이 실존적 고뇌의 근원이 될수는 있겠지만 ...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인간을 모든 고난에서 해방시킬지 모른다.
육신의 어떤 괴로움도 모조리 이겨낼수 있을것 같다.

김기림   - 2011/05/14 04:48:24  
이 수필을 읽고나서 인간에게 더 이상 무슨 무서울것이 있을가 싶다.
卽來之, 則安之..................

리쳐드   - 2011/05/14 04:59:04  
데레사는 “고통은 은총의 전주곡이다"고 했습니다.죽음은 다시 부활의 시작 이 될수도 있습니다. 할레루야.
연변독자   - 2011/05/16 05:21:38  
이런 수필은 평생 처음 읽는다............
박상욱   - 2011/05/17 00:04:10  
혹시라도 나의 눈구멍 안에서 살찐 들쥐가 불쑥 튀어나오고, 등뼈밑에서 송장벌레들이 우글거려도 ....

이런 표현 소름이 돋군요.
희망의 향기   - 2011/05/17 01:26:32  
무서운 귀신영화같은 글이라 생각했지만, 읽으면 좀 안탑깝기도 하고, 또 재밌는 글입니다.
유선생님 죄송합니다. 유선생님의 글에 이제야 다가와서 리플답니다.

낮에는 장집 바로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다가도 밤만 되면 어김없이 장집 안에 들어가 죽었을 때의 모습처럼 곱게 단정하게 누워있겠다.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내가 완전히 풍화할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만들겠다
여기에서 너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망의 향기   - 2011/05/17 01:26:50  
저는 무슨 평가는 낼줄 몰으겟습니다만.. 읽은뒤 느낌을 말한다면,, 몇백년 몇만년 살것같이 지금 살아가고있으면서,, 언젠가는 곧 오게될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글을 읽구나서, 죽음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어야 하는지를 .. 그리고 그렇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기억이 남아 았을때.. 나두 <<낮에는 장집 바로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다가도 밤만 되면 어김없이 장집 안에 들어가 죽었을 때의 모습처럼 곱게 단정하게 누워있겠다.>> 이럴까.. 고 상상도 해봅니다. ㅋㅋ

질서없는글 늘여놓아서 죄송합니다.

이번 수필도 너무 멋진 수필입니다.. 너무 좋아합니다.. 유작가님의 글요^^
건강하세요~~좋은글 많이 써주세요~~ 기다릴께요^^
이동화   - 2011/05/17 15:03:17  
글에 담긴 내용이 심오해서, 저의 내적세계랑은 잘 공명을 일으키진 않지만요, 그냥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봅니다. 저는 어릴적에 머리카락 뽑아서, 그 모양새로부터 몇살까지 살 수 있을지 추측해보는 놀이를 좋아했던 거 같애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제가 몇살까지 살 수 있을지, 그리고 죽으면 가족들한테 화장한 후 강가에 뿌려달라고 할지 아님 남겨달라고 할지 항상 고민해왔었어요. 또 장기기증 할 생각도 해봤구요. 하지만, 이런 것보다, 죽기 전에 항상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여, 앓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여, 자신도 편하고 주위 사람들한테도 불편함을 끼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육손가락   - 2011/05/24 11:26:07  
김성희박사님은 유작가의 <겨울요정><살구꽃이 필 때>를 평론하였던데
아마도 이 두 작품을 제일 좋은 작품으로 보았던것 같다.
그러나 나는 유작가의 수필작품들속에서 <장집>을 최고로 본다.
이 수필작품은 정말 조선족문학사에서 쉽게 다시 나올것 같지 못하다.
어떤 작가인들 이런 작품을 써낼수 있을가?
시같은 간결함, 소설같은 이야기, 작가가 독자들에게 주고있는 강렬한 메시지,
너무 진동이 크다,,,
멋진인생   - 2011/05/25 01:56:14  
완전 완전 짱임다..
건강하그..홧팅~~ㅎㅎ
최금순   - 2011/05/25 14:09:56  
죽을때는 그래도 친인들이 지켜보는데서 눈 감는것이 제일 행복한 림종이 아닌가요? 리해가 안되네요......
류란심   - 2011/05/27 15:58:19  
최금순님과 같은 생각이네요 ㅠㅠ
홍윤기   - 2011/05/28 00:59:51  
이 수필작품의 절제된 간결한 언어구사가 돋보입니다.
무서울 만큼 절제하여 품위를 확보해 낸 것은 이 수필작품의 언어적 매력입니다.
간결 명료하고 정확한 문장의 평명한 표현과 템포가 빠른 진행감이 좋습니다.
서운한 점이라면 독자들이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수필문학은 긴장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긴장을 푼 채 읽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머뭇거리지 않고 경쾌한 속도로 진행시켜 나가는 것은 정말 좋습니다.
이런 점이야말로 현대의 독자들 한테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옥'이 그런 수필입니다.
香香   - 2011/05/29 03:05:09  
讨厌死亡...
최준   - 2011/06/05 05:19:18  
언젠가는 나도 틀림없이 그런 모양을 하고, 그나마 있던 정, 없던 정까지도 모조리 다 까먹고 가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갑니다. 추천드립니다.
공평저울   - 2011/07/13 02:33:43  
상당히 독특함.
김종수   - 2011/08/03 08:50:08  
제가 이 수필에 심취하게 된 것은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죽음에 임하여 이럿듯 흐뭇한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작품을 아직 몇편 읽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잘 된 작품입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수   - 2011/08/03 08:50:53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꾸며진 자기 완결성이 높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독고 민수   - 2011/08/03 12:31:10  
지인의 소개로 이 싸이트에 와서 이처럼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킵니다.
실존적 절망감을 암담하게 표현해주는 이러한 세계로부터 사람들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런지?
참으로 이 글을 쓴 작가님만의 독특한 탈출 방법입니다.
언어가 참으로 핍진하고 진부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언어들이 다시 건강한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진실을 전달하고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힘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기대하여 봅니다.
강신아   - 2011/08/27 21:36:01  
진동이 읽은뒤 아직까지 느껴진는 소설같은 수필!! 잘 읽었습니다.
유작가님
좋은글 읽구갑니다.
최학송   - 2011/08/29 10:27:49  
유작가님의 작품에서 비롯되는 문학이란 대단합니다.
정예은   - 2011/09/05 09:40:10  
유작가님의 글을 읽고싶어 또 들렸습니다.

잘 읽구갑니다~
장숙   - 2011/10/23 22:32:03  
정말 충격적이네요~ 근데 기분이 너무 그렇습니다.~
희망의 향기   - 2011/11/03 13:40:58  
유작가선생님 장집을 읽구갑니다. 좋은작품 늘 감사합니다~~
김국태   - 2011/11/06 22:49:55  
읽다보니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섬뜩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여나
누구나 비켜갈수가 없는 인생의 종착역이 아닌가요.
어떻게 가는가도 하나의 예술인것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퍼포먼스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지만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고 또 땅이 지켜보고 있지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정예은   - 2011/11/07 19:47:16  
장집 이수필은 다시 찾아 읽고싶어져요~
이미   - 2011/11/12 07:41:01  
글이 짧지만 가슴을 울립니다.
이미   - 2011/11/12 07:41:56  
이작품은 한번만 읽구 끝날글이 아닙니다 추천합니다.
최향   - 2011/11/26 00:19:12  
유작가님 오랫만입니다. 건강하십니까?겨울요정도 듣도 장집같이 좋은작품도 읽구갑니다~
유작가님 올해도 마무리 잘 하시고 건강하시고 내년에도 좋은모습으로 더많은 좋은작품으로 만나길 바랍니다
한이슬   - 2011/11/28 01:02:08  
담이 작아서 이제야 들려서 읽고 갑니다. 생각보다 무섭지도 않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ㅎㅎ
여태껏 죽음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나니 진지하게 고민에 좀 빠져볼까 합니다.
좋은 작품 잘 읽고갑니다.
박설매   - 2011/11/30 22:15:18  
유순호작가님은 연변에 출신입니까? 지금은 미국뉴욕이시네요.
자랑스럽습니다.
장집 추천을 해요
지경화   - 2011/11/30 23:10:53  
이렇게 죽는 것도 다 계획하는구나?
최준화   - 2011/12/02 13:04:31  
저는 지금까지 글을 많이 읽었다고 자신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지만은 않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읽고난 뒤의 감상이 수상하리만치 마음속에 남는 글은 정말 처음입니다.
명작이 아니고는 이럴수가 없다고 봅니다.
리예화   - 2011/12/02 13:46:33  
최준화님의 말씀에동의합니다. 명작이아닐수없습니다
작가님 수필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성이   - 2011/12/03 19:27:16  
ㅠㅠㅠㅠㅠ

소름이 오싹해요..
오영자   - 2011/12/12 00:42:47  
무서웠어요...
보다못해   - 2011/12/12 03:49:33  
리플평론이 너무 오버하는같다.

보다못해 한마디 하겠다

이 수필이 그렇게 잘된 수필이라구?

마귀할멈   - 2012/01/11 15:59:37  
긴장과 공포 상상을 불러오는 글 단숨에 읽엇습니다,,
죽음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고
여태 사람 죽는 순간도,죽은것도 본적이 없습니다,,
<장집>여운을 마니 남기는 글이네여,,
추천합니다~~
리화옥   - 2012/02/08 18:47:32  
이 글 읽으니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무거워 지네요.
김송화   - 2012/02/20 18:06:09  
청설작가님장집을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생각이 더 많이 지는것같습니다.
그곳까지 가기전에 정말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갑니다.
????   - 2012/02/24 23:12:08  
읽고 또 읽어도 명작은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 특징.......
金永艶   - 2012/03/02 01:51:13  
《葬屋》應是不杇的名著
金永艳   - 2012/03/03 00:21:45  
相信冥冥自有定数,无论怎么个说法,历史发展就是这样.
륙효화   - 2012/04/26 11:34:31  
아. 이 글은 정말 너무 충격이예요...
여정미   - 2012/05/16 07:47:13  
이 수필작품속의 짙은 음영은, 주인공인 '나'가 처하고 있는 일종의 소외 의식에 대한 무언의 도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작품의 정수는 갇힌 세계, 또는 열등 의식의 세계를 그대로 파헤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속에서 자신의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초극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오랜 세월을 두고 빛을 발하게 될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장미화   - 2012/07/08 00:23:00  
여정미님의 댓글에 동감입니다.!

너무 좋아합니다. 이작품도..!
오향란   - 2012/11/18 14:40:24  
장집 좋은 작품을 읽고 가요. 작가님 작품은 어느하나 없이 다 잼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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