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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좀비] 발췌
피안   Hit : 2891 , Vote : 24        [2019/08/12]







<뉴욕좀비> 저자 인터뷰 - 생의 본능과 에로티시즘에 관한 우리들의 자화상
내 삶은 본능에 잠재한 천사와 야수의 싸움 야수는 언제나 또 다른 욕망으로 나를 유혹한다





루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루시는 허둥지둥 낚시다리 쪽으로 뛰어갔다. 뒤에서는 페레즈 신부가 성당 쪽으로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실려 왔다.

하늘의 여왕이여,
천사들의 모후여,

모든 이들 위에 영화로운 동정녀여

그레고리는 두 손에 낚싯대를 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호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뒤통수에 눈을 또 하나 숨겨둔 사람처럼 루시의 미세한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오늘도 잉어 잡았어? 릴낚시도 아니고 대낚시로 잉어 낚는 사람은 아마 트라우트나 벨카라 낚시꾼 중에서 당신뿐일걸.”
그녀는 그레고리 등 뒤에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날 그레고리는 잉어는 한 마리도 못 잡고 붕어만 10여 마리 낚았을 뿐이었다. 그나마 작은 붕어는 다시 놓아주고 좀 큰 붕어 몇 마리만 물통에 있었을 뿐인데, 루시 눈에는 모두 잉어로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루시 눈에, 머릿속과 마음속에 붕어나 잉어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온통 페레즈 신부 생각뿐이었다. 핸드폰을 잡은 두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눈 깜빡할 사이에 벌써 문자 여러 통이 신부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신부님, 정말 죄송해요. 아까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나요? 제가 평생 머릿속에 떠올리기 싫었던 우리 집안 이야기를, 생부가 누군지도 모르는 저의 가장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신부님께 하다니요. 제가 신부님과 하나의 영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이것이 루시가 보낸 문자였다. 루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있었다.
‘루시가 먼저 페레즈 클레타한테 꼬리 쳤을 거야. 틀림없어. 혼혈이 뭐가 어때서? 그런데 생부도 누군지 모른다고? 사생아였잖아, 세상 고귀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내가 라인란트 바스타즈 (9 주석)의 후손이라고 고백해도 전혀 무관심하더니 왜 갑자기 사춘기 때 이야기까지 끄집어내지? 왜 신부를 유혹하냐고!’



주석(9)  Rheinland Bastards, 라인란트의 사생아들이란 뜻으로, 1차 세계대전 후 라인란트에 주둔했던 프랑스 식민지인 세네갈 출신 병사들과 독일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을 말한다.



그레고리는 마음속으로 거침없이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럼, 진짜로 그레고리한테 당신 눈빛만 봐도 당신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단 말인가요?”
그레고리와 여러 번 만났던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가 ‘계단 오르는 휠체어’로 특허를 받은 것이나 장애가 있는데도 꾸준히 창작하여 꽤 많은 작품을 선보인 건 인정하지만, 눈빛 하나로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은 별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시는 머리를 저었다.
“처음엔 저도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그는 대충 짐작하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신부한테 보낸 문자 내용까지 알아맞히더라고요. 말 그대로 귀신이었어요. 알고 보니, 그레고리는 제 핸드폰에 몰래 앱 하나를 깔아두었더라고요. 제가 누군가와 주고받는 메시지를 자기 핸드폰으로 모두 볼 수 있었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버나비로 갔어요. 물론 그레고리한테 거짓말하고서요.”
루시는 그날 호숫가에서 자신의 비밀을 페레즈 신부에게 털어놓고 나서부터는 마음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불타는 열병’이었다.
‘성적인 접촉이 금지된 신부와 영적으로 하나 되는 길로 겁 없이 걸어가도 되는 걸까?’
끝없이 자신에게 반문하던 루시는 문득 강렬한 자신감이 생겼다.
‘비록 천한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나에게는 귀족 같은 금발과 푸른 눈이 있어, 마음먹고 꾸미면 얼마든지 화려하고 섹시하게 보일 거야. 비록 나이는 서른에 가깝지만 난 여전히 젊고 건강하고 섹시해.’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적 비약이었지만, 자신감은 그녀를 ‘불타는 열병’ 속으로 떠밀었다. 이미 너무 깊숙이 신부에게 빠져들었다. 설사 그레고리가 자기 마음을 눈치채고 경계한다 해도 어느 날 꿈같은 순간이 들이닥친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고 행복하게 그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샤워를 마친 다음에도 한동안 거울 앞에 멍하니 서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곤 했다. 늘 보던 익숙한 몸이지만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기는 처음이었다.
“거울 안에서 발가벗은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루시는 며칠 후 버나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버나비는 비록 크지는 않으나 캐나다의 도시치고는 비교적 인구밀도가 높았고, 관광명소로 유명했다. 줄곧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버나비에서 혼자 지내게 된 것도 즐거웠지만, 가톨릭 교구 산하 교육협의회에서 열리는 이사진 총회에 주요 임원으로 참가한 페레즈 신부와 만날 약속에 더 들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타지에서 만나 식사나 함께하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미사 후 짤막한 친교 시간에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던 루시에게는 맘껏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루시, 너무 맑군요. 우윳빛같이, 버터 색같이 뽀얀 피부….”
루시가 브라 하나만 남기고 상의를 모두 벗자 신부는 천천히 다가와 루시 앞에 무릎을 털썩 꿇더니 천진한 소년 같은 눈빛으로 루시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지금이라도 고백하면 늦지 않아요.”
루시는 바지 호크를 풀려다 말고 머리를 한 번 끄떡였다가 이내 다시 저었다. 그러자 신부는 마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인 양 벌떡 일어섰다. 호크를 풀고 지퍼만 내리면 루시를 소유할 수 있었는데도 갑자기 냉랭하게 한마디 물었다.
“루시, 이게 처음이 아니군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루시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페레즈 신부의 ‘처음’이란 숫처녀를 뜻하는 것이었다. 신부는 하반신이 없는 그레고리와 루시가 부부지만 둘 사이에 성행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시가 남자를 경험해보지 못한 처녀 몸을 간직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루시의 생각은 달랐다.
‘꼭 성행위를 해야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섹스는 하지 않더라도, 부둥켜안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걸 성행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부님은 내가 그레고리와 함께 살아온 몇 해 동안, 이런 행위조차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때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신부님이 원한 건 하이먼(10 주석)일지도 몰라.’
루시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신부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주석(10) hymen, 처녀막.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루시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벗었던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 유두가 딱딱해져 있었다.
‘어머나, 언제 이렇게 커졌지?’
귓속이 윙윙거리면서 어쩐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신부님은 나를 부정한 여자로 판단했어.’
그러나 루시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이라도 옷 입는 걸 말린다면 기쁘게 신부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금세 수포가 되었다.
페레즈 신부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말은 고사하고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는 평소 즐겨 부르던 성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늘의 여왕이여,
천사들의 모후여,

모든 이들 위에 영화로운 동정녀여

아름다운 이 노래, 어제까지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귓속뿐만 아니라 가슴 깊은 곳까지 감동을 주었는데, 지금 ‘천사’니 ‘동정녀’니 하는 단어는 그대로 비수가 되어 꽂혔다.
“아니, 안 돼요! 못 가요!”
루시는 소리를 지르며 신부에게 매달렸다.
루시는 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듯 말을 이어갔다.
“제가 다 이야기할게요. 하나도 숨김없이.”
“숨김? 어떤?”
신부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사춘기 때 문제가 생겼어요.”
“그때 이미 성 경험을 한 건가요?”
“멘서트루에이션이 안 오는 거예요.”
루시가 생리를 좀 복잡한 단어로 표현하는 바람에 신부는 잠깐 얼떨떨했으나 금방 알아차렸다.
“아, 피리어드.”
“친구 중에는 아홉 살 때 시작한 아이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열일곱에 겨우 시작했어요.”
“아, 그렇게나 늦게.”
“다른 애들이 템포를 가지고 다니는 걸 보고도 그게 뭔지 몰랐어요. 피리어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었어요.”
루시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미 생리 이야기도 꺼냈으니 다음 이야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생 혼자 안고 온 비밀을 누구에겐가 꼭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딸이 하나 생겨 그 딸이 자라 생리하게 될 때쯤 하나씩 가르쳐주고 싶었던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그레고리가 저렇게 되었으니 저한테는 이제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어요.”
“그래서요?”
내가 물었다.
“신부님이 자꾸 재촉하더라고요.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었냐고요. 그래서 전부 털어놓고 말았어요.”
루시는 페레즈 신부가 알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떠나려는 신부를 붙잡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열일곱 살이 되도록 가슴이 커지지 않았어요. 피리어드는 저만 숨기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가슴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찌 된 영문인지 젖꼭지도 안 보였고요.”
이렇게 말하는 루시의 양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눈은 별처럼 빛나는 신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레즈 신부는 몇 번이나 가슴에 십자가를 그어가면서 루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나중에 엄마한테 따졌어요. 머리가 금발이면 뭐하고 눈이 푸르면 뭐하냐고요. 그러니 한국인 아버지라도 돌려 달라고 했어요. 엄마는 그럴 때마다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하더니, 10년이 되니까 이제는 단념하는 눈치였어요. 말로는 죽었다면서요. 엄마도 계속 기다리는 것 같아요. 가게를 다른 데로 옮기지도 않고 그만두지도 않잖아요. 아버지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때 자기를 찾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거 아니면 뭐겠어요. 불쌍하고 바보 같은 우리 엄마. 전 엄마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어요.”
루시 이야기는 어느새 다른 데로 튀었다.


그 후부터 루시는 그레고리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한 번 화가 나면 오히려 어떻게 하면 그레고리를 골탕 먹일지 궁리했다. 한 번씩 채찍에 맞고 나면 죽여 버릴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꼭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해. 안 그럼 진짜 끝장이야.’
이렇게 무서운 결심을 하고 또 하면서도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그녀는 여전히 다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지독한 여자가 못되었다. 그러나 몇 해 전에 비해 자신이 훨씬 담대해지고 강인해졌음은 알고 있었다.
‘호르몬 때문이야.’
섹스 충동이 일 때마다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호르몬의 짓궂은 장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레고리, 우리도 이제는 먹고살 만하잖아. 다시 작품 활동 안 하고 싶어? 할 거면 내가 도울게.”
그녀는 그레고리를 부추겼다. 그레고리 역시 ‘계단 오르는 휠체어’ 특허로 꽤 많은 돈이 생기자 작품 활동을 재개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던 중이었다.
“그럼 당신이 먼저 뉴욕에 가서 우리가 살 집 좀 알아봐. 작업실도 좀 알아봐 주고, 작업실은 집 근처면 좋겠어.”
작가 대부분이 인생의 어느 한때 슬럼프를 겪지만, 그레고리가 겪었던 이 슬럼프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재앙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만 빼놓고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아주 죽여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혹독했다. 그런데도 그는 재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레고리는 루시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이 몸통 절반까지 잃어버리는 위기를 겪은 것은 젊은 시절, 하루라도 빨리 성공하여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 살아야 했어. 실제보다 더 커지려다가 그만 ‘구멍’에 빠져버린 거지.’
그레고리는 휠체어에 앉아서 조금씩 자기에게서 멀어져 가는 아내 루시의 변화를 지켜보며 작품의 주요 모티프를 구상했다. 이미 자신을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를 것 없는, 좀비 정도로 여겼다. 나보다 나를 작게 만들었다면, 이 구멍에서 무난히 빠져나갔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좀비가 되어 버렸다고 자책했다.
‘그래 맞다. 내 위기는 나보다 큰 나를 보여주려다 생겼다. 지금이라도 먼지처럼 작아질 수만 있다면 위기를 분명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레고리는 루시의 아버지 EJ를 위기의 탈출구로 삼기로 했다. 루시가 버나비에서 페레즈 신부와 밀회하면서 내뱉은 비밀을 엿들으면서 구상한 것이다.

“I'm going to confession. I am a guilty man.”
(죄를 많이 지었으니 고해하러 간단다.)

이런 말을 남겼다는 EJ가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는 루시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도 한몫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다시 돌아오게 만들 인연 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누가 누구에게 지은 죄인지,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지만, EJ는 아주 큰 한을 품고 에리카와 루시 인생에 저주나 주술 같은 것을 걸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작품에서 EJ, 그는 누구여야 하는가? 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그와 나의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에 빠져 끝없이 추상과 비구상을 거듭하다가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좀비〉였다.
내가 보기엔 이 작품의 좀비는 그레고리 자신이었다. 그레고리는 이 좀비를 자기 자신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고의로 상·하반신을 분리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하 생략)


먼저 뉴욕으로 돌아와 맨해튼 서쪽 5번가에 집을 구한 루시는 리모델링하는 동안 며칠은 부근에 있는 비교적 저렴한 YMCA 호텔에서 지냈다.
“그레고리, 리모델링이 최소한 한 달 이상 걸린다는데, 어떻게 할까? 그냥 당신한테 가 있을까?”
두 사람은 캠을 켜고 대화했다.
“아니, 그러지 마. 그 사이 소호나 첼시 쪽에서 작업실도 알아보고 트라이베카에 있는 조한나한테 한 번 찾아가 봐. 이번 작품에 프레임 씌우는 작업은 조한나 아니면 안 돼. 벌써 프레임 컬러를 어떤 색상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거든. 좀비 상반신과 하반신을 잘라 버렸으니 분명 피가 흘러나올 텐데, 그 피 컬러로 브라운을 쓰면 좋을지, 블랙이 좋을지, 마호가니브라운이 좋을지 판단이 안 서.”
그레고리는 루시 입에서 2주째 성당에 못 가면 어떡하느냐는 말이 나올까 봐 쉴 새 없이 화제를 꺼냈다.
그레고리는 버나비 호텔에서 루시와 페레즈 신부가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그의 핸드폰에 고스란히 저장해 두었다. 비단 루시를 감시하는 것은 핸드폰에 몰래 심어놓은 앱만이 아니었다. 거액을 들여 고성능 도청기까지 몇 대 구입해 루시가 늘 들고 다니는 핸드백은 물론이고 노트북 가방과 신발 깔창에까지 보이지 않게 넣어두었다. 이 괴물들은 하루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작동했다. 페레즈 신부가 울며 매달리는 루시를 가까스로 떼어놓고 호텔에서 달아나면서 그레고리의 의심을 더는 받지 않게 해주었던 것도 이 괴물 덕이다. 잡음을 완전히 차단하는 보스 헤드폰을 귀에 건 채 호텔 방에서 나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곧 부둥켜안고 뒹굴겠지. 방금 호텔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군. 물소리? 샤워실 문을 열어둔 채 씻다니. 클레타만 도착하면 바로 뒹굴 건가.’
그레고리는 하반신이 없었지만 못 하는 일이 없었다. 계단도 오르내리는 휠체어라 집 안팎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오갔다. 늘 헤드폰을 쓰고 있어 사람들은 그가 온종일 음악을 듣고 있다고 여겼다. 핸드폰 배터리가 부족할까 봐 비상 배터리 팩을 항상 휠체어에 매달고 다녔다.
객실 문이 열리고 페레즈 신부가 들어왔다.
신부 입에서 루시의 피부가 희고 맑다는 칭찬이 나왔을 때, 그레고리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샤워하고 나온 루시와 신부가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부둥켜안고 루시 등을 어루만지거나 보았다면 신부는 기겁했을 것이다. 등엔 생채기 흔적이 엄청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루시는 등만큼은 나 말고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레고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앞에 보이는 식칼을 뽑아 들었다. 늘 두툼한 성경을 안고 다니던 페레즈 신부의 왼손과 성호를 긋던 오른손을 차례로 떠올리며 부르짖었다.
“저놈의 성호를 다시는 긋지 못하게, 저 손가락부터 싹둑 잘라버리겠어! 루시 가슴도 젖꼭지부터 잘라 내주지. 고통 속에서 한없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갑자기 그레고리는 헤드폰을 벗어던지더니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흐느껴 울었다.
‘오, 거룩하신 성모여, 왜 저를 이토록이나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제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루시를. 성모께서 페레즈 클레타를 부디 제지하여 주옵소서.’
그레고리는 진심으로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하늘의 여왕이여,(11 주석)
천사들의 모후여,
이새의 뿌리여,
세상에 빛을 낳으신 문이시여,


(주석11) 가톨릭 성가, 〈하늘의 영원한 여왕(Ave Regina Caelorum)〉


기뻐하십시오,
모든 이들 위에 영화로운 동정녀여,
오 아름다우신 분이여,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 빌어주소서.


기도를 마치고 바닥에 내던졌던 헤드폰을 주워 막 전원을 꺼버리려 할 때였다.
“신부님, 이대로는 못 가요.” 하고 루시가 신부에게 매달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레고리는 당황스러웠다. 계속 이대로 엿듣다가는 진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이미 둘이 관계했을 거라고 여겼는데, 루시가 떠나려는 페레즈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루시, 여기서 멈춰야 해요.”
“저를 구원해주시면 안 되나요? 영혼으로 하나가 되자고 먼저 말씀하셨잖아요.”
“영혼으로 하나 되는 것과 육체로 부정해지는 건 다른 문제예요. 나는 당신을 구제할 사명이 있습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12 주석)
영원으로 열린 하늘의 문이시며,
바다의 별이시여,


(주석12) 가톨릭 성가,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Alma Redemptoris Mater)〉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거룩한 창조주를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입에서 나온 인사를 받으신 후에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라도 숨김없이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나한테 들려주세요. 당신의 보속 (13 주석)을 약속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통회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기도하면서 자신이 한 여자에게 ‘넘어지는 백성’임을 인정했고 자신을 ‘죄인’이라 불렀다. 섹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럴 때 루시가 들려준 아버지 EJ 이야기는 그레고리에게 창작 충동을 일으켰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EJ의 불행한 운명과 그레고리 자신의 운명이 하나로 포개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주석13)  가톨릭 고백성사 용어로, 이미 지은 죄를 징계하는 벌이자 영혼의 허약함을 치료하여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약속이다.


루시가 버나비에서 돌아왔다. 밤이 되자 루시는 평소와 다름없이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레고리. 영혼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며 신부님을 유혹했어. 하지만 실패했지. 너무 괴로워서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채찍으로 때려줘. 그래야 괴로움이 풀릴 것 같아. 다시는 허튼 마음먹지 않을게. 이젠 당신이 주는 괴로움만 즐길게.”

루시가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렸다. 그레고리가 그 위에 훌쩍 올라오더니 루시의 목과 귀를 애무했다. 루시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 그의 입술을 찾았다.
“여전히 당신은 최고네. 됐어. 이제 빨리 채찍을 들어.”
루시는 이불을 당겨 머리를 덮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채찍을 들려 하지 않았다.
“빨리, 그레고리. 참을 수 없어.”
그레고리는 울음을 참다가 루시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루시, 우리 더는 이러지 말자.”
“갑자기 왜 그래?”
“정말 오랫동안 생각했어. 이러는 내가 너무 싫어. 더는 이러지 않겠어. 대신 당신이 가끔 다른 사람과 만나는 걸 허락할게. 내 말 막지 말고 끝까지 들어줘. 이렇게 하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야. 당신이 나에게 더 잘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
그레고리는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때 루시 핸드폰에 앱을 몰래 깔아둔 것이나 핸드백과 구두 깔창에 도청 장치를 넣어둔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루시는 그레고리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당신, 이러지 않아도 돼.”
루시가 그레고리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을게.”
“고마워. 루시. 당신은 내 인생의 천사야.”
두 사람은 서로 다시 태어나기로 약속했다.

그레고리가 〈좀비〉에 이어서 만든 작품 〈빛의 건축〉 역시 이때의 상황과 나눌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인생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다. 빛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틈으로 곁에 붙잡아두었던 사람이 달아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미세한 틈으로 빛줄기가 스며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는 그 틈을 틀어막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틈새는 계속 벌어졌다. 꼭꼭 틀어막자 또 다른 틈이 생겼다. 조만간 틈새는 더 벌어질 것이고, 빛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막지 말고 차라리 빛을 건축하자.’
빛이 마치 벽돌이나 돌덩이라도 되는 듯, 시멘트로 빛을 이겨 벽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빛을 모아야 했다. 틈새를 틀어막은 장벽을 없애고 활짝 열기로 했다. 빛의 존재인 사랑하는 사람도 틈으로 빠져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틈을 막지 않는 한 그는 다시 돌아와 어둠을 빛으로 채워버릴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 이것이 빛의 건축과 틈새의 미학이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들기 전에 좀비 만드는 작업으로 실험했다. 다소 추상적인 작업이었지만, 좀비와 빛을, 또 좀비와 틈을 오버랩시켜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형상화하려는 좀비에 대한 정의를 여전히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때로 그 좀비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잘린 좀비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틈의 바깥과 안쪽으로 나뉜 채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더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말이야, 내 속의 야수는 계속 어둠에 있으려 하고 내 속의 천사는 어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둘은 배타적인 관계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지. 내 속에서 함께 생존해야 하니까. 이렇게 만든 주술사 역시 나 자신이고. 하지만 이런 고난의 굴레가 나 혼자만의 굴레가 아닌 것 같아. 당신 아버지 EJ도 나와 같은 고난에 빠진 건 아닐까? 10년 전 EJ가 집을 나간 날, 그날은 공교롭게도 핼러윈 데이였지. 죽은 자의 날을 맞아 귀신들이 허공을 떠돌던 밤. 그 밤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면…. 나도 늘 내 속의 천사 편이고 싶지만 쉽지 않았어. 오로지 당신의 도움으로 어둠을 걷어낼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작품에서 그 부분을 명확히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 밤의 장막속에서 뛰어나가는 좀비를 통해 빛을 만들어 내는 것. 혹시 알아? 이 어둠의 장막을 깨끗하게 걷어낼 사람이 바로 루시 당신이 될지….”


(이하 생략)




가혜   - 2019/08/12 17:37:19  
조금만 읽었는데도 무지 재밋네요~ 아쉬워용.
최련화   - 2019/08/13 17:23:37  
이미 책을 주문했구요.
여기에 발췌된 부분만 조금 읽었는데도
확 끌리는 느낌이네요.
전체적은 문장풍격이랄까, 중국 조선족식도 아니고
한국적인 멋도 아닌 같아요.
주인공들이 미국인(루시 그레고리)이라서 그런지
주고받는 대화들이랑 서구적인 풍격이 은은하게 뿜기고 있네요.
예하면요,

“그레고리. 영혼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며 신부님을 유혹했어. 하지만 실패했지. 너무 괴로워서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채찍으로 때려줘. 그래야 괴로움이 풀릴 것 같아. 다시는 허튼 마음먹지 않을게. 이젠 당신이 주는 괴로움만 즐길게.”
최련화   - 2019/08/13 17:25:01  
...유혹했어. 하지만 실패했지.
이런 풍격은 정말 백프로 서구적인 대화법이구요.
아, 성모마리아 찬송가는 정말 너무 좋고 신선한데요.
영미문학을 읽고 있다는 착각속에 빠질 지경이었답니다.
작가님, 정말 너무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그라시안   - 2019/08/31 07:36:33  
루시가 버나비에서 돌아왔다. 밤이 되자 루시는 평소와 다름없이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레고리. 영혼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며 신부님을 유혹했어. 하지만 실패했지. 너무 괴로워서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채찍으로 때려줘. 그래야 괴로움이 풀릴 것 같아. 다시는 허튼 마음먹지 않을게. 이젠 당신이 주는 괴로움만 즐길게.”

루시가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렸다. 그레고리가 그 위에 훌쩍 올라오더니 루시의 목과 귀를 애무했다. 루시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 그의 입술을 찾았다.
“여전히 당신은 최고네. 됐어. 이제 빨리 채찍을 들어.”
그라시안   - 2019/08/31 07:36:49  
이 장면 진짜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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