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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출간 안내]
피안   Hit : 9899 , Vote : 336        [2015/06/17]



책 이름
만주 항일 속으로
유순호 저 | 행복한마음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공개하는 역사연구 자료!



- 발췌-

최용건 (崔鏞建 1900-1976)
- ‘진짜배기 독립운동가’가 공산주의자로 둔갑하기까지



[사진설명]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최용건 (최추해는 이때 사용했던 이름)


  
  들어가며

  1964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 운남성에서는, 한창 당계요(唐繼堯,1883年-1927.5.23.)의 무덤을 파헤치는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1900년대 채악과 함께 전계군벌(滇系军阀)을 대표하였던 당계요는, 1949년 중국공산당의 건국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반동군벌’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홍위병 ‘반란파“들은  무덤을 없애려고 하였다. 당계요의 딸 당설령(唐雪玲)이 2003년 9월에 문사자료연구저서인 “당계요연구” 제4편에 발표한 회고문장에 의하면, 무덤은 이미 적지않게 파손되었다. 무덤 주변에 만들어 세워두었던 석인, 석마 등이 모조리 부서졌고 무덤정수리에 만들어놓은 지구의 조각모형과 동으로 만든 수리개 조각상도 누가 뜯어가버렸다. 이제 만약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들어내는 날이면, 당계요의 시신이라고, 산동성의 청도에서 강유위(캉유웨이, 康有爲)의 시신이 홍위병들에 의해 거리바닥으로 끌려나왔던 것과 꼭 같은 처지에 놓여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중국 근대사상의 유명한 정치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는 강유위는 1927년에 세상을 떴는데 일본군이 산동성에 진주하였을 때도 함부로 그의 무덤을 건드렸던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所謂의 새중국이 건립되고나서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이 거리바닥으로 끌려나오는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산동성 정부에서는 강유위의 해골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찾지못하였다. 회고자들은 그때 홍위병들에 의해 부관참시당한 강유위의 해골을 아이들이 거리바닥에서 뽈처럼 차고다니다가 잃어버리고 말하고 있다.

  강유위와 같은 해에 사망하였던 당계요도 사망 37년만에 바로 이와같은 운명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정확히 1964년 12월 19일, 당시의 중국 국가 부주석 동필무(董必武)가 외교부 부부장 한념룡(韩念龙)을 데리고 갑작스럽게 운남으로 날아왔다. 다음날 20일, 운남성의 중공 당서기인 주흥(时任云南省委书记周兴), 조건민(赵健民), 손우정(孙雨亭), 부성장 류피운(刘披云)、사부벽(史怀璧)은 물론 운남주둔군의 사령관들인 이성방중장(李成芳中将), 진강중장(陈康中将)등이 모두 동필무를 따라 운남비행장으로, 곤명시를 방문하러 온 한 귀빈을 마중하러 나갔다. 이 귀빈을 마중하기 위하여 곤명시 정부에서는 3만여명의 군중환영대를 배치하여 비행장에서부터 시내로 들어오는 연도에 모조리 줄세워놓기도 했다. 이 귀빈이 누구였던가?
  중국의 국가 부주석이 직접 마중하러 북경에서 먼 운남까지 달려올 정도로 당시의 중국 정부가 굉장하게 존대하였던 인물이라면 만만치가 않다. 만약 국사방문차 중국에 온 것이라면, 이 인물은 모택동과 유소기, 주은래가 있는 중국의 수도 북경으로 가야했다. 따져보면, 1949년, 중공 건국이후 1964년까지 그는 북경에 다녀가면서 모택동과 주은래와 직접 만났던 적이 자주 있었다. 일단 그가 한번 중국에 온다하면, 모택동과 유소기, 주덕, 주은래는 물론이고, 중공의 유명한 군인들인 임표(원수), 엽검영(원수), 섭영진(원수) 등 어마어마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와 만나러 찾아오군 하였다. 그런데 이날만은 북경이 아닌 운남성에 도착하여 그가 한 일이란, 바로 중국 정부에서 한창 부수고 있었던 당계요장군의 무덤에로 직접 찾아가 절을 올린 것 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64년 12월23일자 운남일보(云南日报)는 아프리카 및 캄보디아 방문을 마치고 북한으로 귀국하던 조선(북한)의 최용건(崔庸健)위원장이 갑작스럽게 중국의 운남성 곤명시에 들렸다가면서 자신을 반갑게 환대해준 중국의 당, 정, 군의 지도자들인 “모택동, 유소기, 주덕, 주은래에게 감사의 전문을 보냈다”는 기사를 신문의 1면에 내보냈다. 물론 기사속에 최용건이 당계요장군의 묘지를 방문하고 절을 올렸다는 내용은 일절 없었다. 그러나 최용건은 동필무를 만난 자리에서 “은사인 당계요장군의 묘지에 가보려고 운남에 들렸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운남성의 당과 정부 관계자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성위 서기 조건민은 그날 밤으로 주은래에게 이 사실을 회보하면서, 특히 자기들이 당계요의 묘지를 한창 파헤치고 있는중이라고 말하자, 주은래는 크게 화를 냈다.

   “최용건동지는 당계요장군의 학생이오. 후에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에 와서 교관과 구대장도 하였소. 자기 스승의 묘지를 망가뜨린 것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소. 당신이 직접 책임을 지고 밤새로 당계요장군의 묘지를 회복시켜놓아야 하오.”

  급기야 운남성 정부에서는 시공일군들을 보내어 밤새로 묘지의 파손된 부분들을 대충 땜질하였고, 또 어디서 당계요의 석상까지 찾아내어 급기야 운남강무당 학교 옛터로 들어가는 길 한복판에 세워두기까지 했다. 20일, 최용건은 당계요의 묘지로 찾아가 꽃을 드리고 절을 올렸다. 묘지가 위치한 원통산에서 내려와 그길로 운남강무당 옛터로 갔는데, 학교 주청사를 모두 허물어버렸기 때문에, 얼굴에 웃음기라고 보이지 않은 최용건은 서툴은 중국말로 불만을 나타냈고 그것을 직접 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곤명시에서 2일 머물으며 최용건은 모두 세곳을 방문하였는데 당계요장군의 묘지와 운남강무당 옛터에 이어 운남대학교에도 들렸다. 당시 운남대학교에서 공부하였던 학생들은 모두 최용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북조선의 최용건은 아주 유명하다. 그는 우리 운남에서 강무당을 나왔고 황포군관학교에 가서는 교관이 되었고, 광주폭동 때 벌써 특무영 련장(중대장)이었다. 우리 운남에서 공부하였던 외국인들가운데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최용건이다. 최용건과 함께 공부한 한국인(이범석)이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남조선에 돌아가 국방부장(장관)이 되었다.”


  항일연군의 영원한 실세


  “석천 최참모장”, 혹은 “최석천”, “최참모장”, “抗聯 7군의 주요영도자” 이런 식으로 최용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주보중의 유격일기”(周保中遊擊日記)는, 중국 정부관방에서 만주의 항일연군에 대하여 연구하는데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권위적인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최용건은 최후로 항일연군 제7군의 군장에까지 올랐고, 또 1940년에는 제2로군의 총참모장까지 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10여년 남짓하게 만주에서 지내는 동안 최용건은 줄곧 참모장직에 머물러있었다. 동북항일연군에서 참모장은 주요한 군사간부에는 속하지만 군사작전에 있어서 최후의 결정자는 아니었다. 즉 가장 주요한 군사조수, 또는 책임적인 조직자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사진설명]

운남강무당 시절의 주보중


  중공당 계열의 만주 항일부대에서 최용건과 같은 한인이었던 허형식(의병장 허위의 堂姪)의 경우에도, 그는 제3군의 창건자였던 조상지(趙尙志)의 곁에서 군사조수로 오랫동안 활동했고, 종당에는 조상지를 이어 제3군의 군장과 제3로군의 총참모장까지 되었지만, 당시 허형식의 부하로 따라다녔던 중국인 생존자들은 그에 대하여 회고할 때 모두 “허사(단)장”(許師長)으로 부르고있었다. 이는 그가 최후로 어떤 직위에까지 올랐는가가 주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가 어떤 직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었는가가 주요하다는 설명이 되기도 한다. 1928년에 만주로 나왔던 최용건은 만주를 떠나 소련의 하바로프스키로 들어갈 때까지 장장 12년동안을 주로 흑룡강성 북부 요하지방에서 활동하였는데, 요하유격대시절부터 시작하여 이 유격대가 항일연군 제4군 2사를 거쳐 제7군으로 개편되기까지 줄곧 유격대 참모장과 퇀(연대)참모장, 사(단)참모장, 그리고 7군의 군 참모장으로 있었다. 이 기간에 물론 제7군의 군장자리를 놓고 최용건은 중국인 항일장령들이었던 진영구와 경락정, 그리고 정로암 같은 사람들과 눈에 쌍심지까지 켜가면서 싸워 이겼던 때가 여러번 있었다. 하여 일시적으로 군장대리(代軍長)직을 꿰차기도 했다가, 다시 내려놓기도 하는 등 “올라갔다, 내려갔다”하기를 여러차레 반복하였다.
  중공당 길동성위원회 서기였던 송일부가 일본군에 잡혀 변절하고, 주보중이 성위원회 서기직과 제2로군의 총지휘직을 겸직하고 있었다. 최용건은 경락정의 죄목을 나렬하면서 죽여버리겠다고 하였을 때, 주보중은 절대 죽여서는 안되며 일단 경락정의 군장직을 잠시 정지시키고 좀 더 조사해보자고 말렸으나 최용건이 들으려고 하지않았다. 1940년 3월26일 최용건은 경락정을 “변절을 선동하였다”는 죄를 덮어씌워 총살해버리고나서 “원체 사태가 엄중하고 상황이 긴박한데다가, 경락정이 당장이라도 일본군쪽으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미 총살해버렸다.”는 내용의 편지를 주보중에게로 보냈다. 이 편지를 전달하였던 장동식(張東植)은 경락정과 함께 도주할 것을 謀議했다고 자백한 이덕산을 심사하는데 함께 참가했다. 장동식이 “혹시 주총지휘께서 경(景, 卽景乐亭)을 죽이지못하게 하고 총부로 압송하라고 하면 어떻게할것인가?”고 걱정하였더니 “주총지휘가 편지를 받게 되었을 때는 저자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고 배포가 유하게 대답했다.


[사진설명]

1963년 6월9일, 북한의 국가지도자가 된 최용건이 중국방문길에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주보중과 다시 만나 반갑게 손을 잡고있다


   최용건이 경락정을 죽이는데 깊이 관여했던 중국인 항일장령 왕효명은 그때 직접 주보중으로부터 파견을 받고 “하강 3인 대표단”의 신분으로 7군 군부에 와서 전문적으로 최용건을 도왔던 사람이다. 주보중의 심복이었던 왕효명은 한편으로 최용건의 부하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사실상 최용건이 경락정을 죽여버리겠다는 뜻을 몰래 주보중에게 내비쳤을 때, 주보중이 공식적으로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실지에서는 그것을 묵인했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라고 암시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설이 오늘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1940년 3월26일, 동북의 항일연군이 만주에서 배겨나지 못하고 육속 소련경내로 이동하고 있던 때에 발생한 일이었다. 항일연군 역사에서는 경락정은 조상지에게 살해당하였던 항일장령 기치중(항일연군 11군 군장)과 함께 두 번째로 자기의 동지에게 총살당하였던 비운의 주인공으로 되고말았다. 오늘날 경락정도, 기치중도 그들은 모두 중국 정부로부터 항일열사로 재평가 받고 있다. 그들에 대한 처결은 잘못 된 “착살”(錯殺), 혹은 “오살”(誤殺)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치중을 총살하였던 조상지는 그 때문에 중공 당내에서 당적까지 다 떼우고 자기가 손수 창건하였던 제3군에서 쫓겨까지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최용건은 아무 일도 없었다. 1942년 7월에는 항일연군의 잔존부대가 소련에서 모여 국제교도려로 편성될 때, 최용건은 여기서도 또 부참모장(참모장은 부여단장인 소련홍군 시린스키가 겸임)과 함께 중공당 동북위원회의 서기직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만주성위원회 서기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고 있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중공당 수뇌부 연안과 오랫동안 연락두절이 된 상태에서 소련군에 편입되었던 이들의 당 위원회는 그냥 허수아비 조직에 불과하였고, 기껏해야 부대원들이 학습과 훈련을 뒷바라지는 총무부서에 지나지않았다. 어쨌던 이때도 주보중과의 친분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산주의 “공”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직한 사나이


  1945년 일제가 투항한후 북한에 돌아가 북한군대를 창설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던 최용건은, 6. 25 전쟁 이후에는 북한의 국가수반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을 몰아내고 대신 위원장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가장 전형적인 무관형의 군인이었던 최용건이 이때로부터 정치가로 변신하고 중국과 소련을 빈번하게 오가면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의 당과 국가지도자들속에는 최용건과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최용건이 중국에 온다하면 모택동이 반드시 그와 면담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유소기, 주덕, 동필무, 주은래같은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그를 비행장까지 마중하고 배웅하고 하였다.
  1963년 6월9일에 촬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진 한 장이 이 사실을 증명하는 아주 좋은 사료로 남아있는데, 주은래가 직접 연회를 마련하고, 중국의 당과 군대 안에서 최용건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몇몇을 특별히 불러다가 함께 참석시켰던 적 있었다. 그속에는 중국 군대의 원수(元帥)들만 네사람이나 들어있었다.

   이 사진 왼쪽으로부터 풍중운, 하룡(賀龍, 元帥)、진의(陳毅、元帥), 주은래, 최용건, 이효순, 박성철, 엽검영(葉劍英、元帥), 섭영진(聶榮臻、元帥), 주보중 순인데, 이때 주보중은 직위가 이 몇몇의 원수들에 비해 높지는 않았으나, 혁명 자력(資歷)면에서는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최용건이 처음 주보중과 만난 것은 1922년 11월,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군사학교인 운남강무학교에서였다. 두 사람은 함께 17기를 졸업했는데, 꼬박 2년동안을 함께 보냈다. 그때 그들을 가르쳤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 바로 최용건이 후에 찾아와 성묘까지 하였던 운남의 심계군벌(滇系军阀) 당계요(唐繼堯,1883-1927.5.23)였다.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당계요는 일찍 한국의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1880.1.13.-1922년.9.25일)친한 사이었고, 신규식의 부탁을 받고 이범석 등 몇몇 임정계통의 한인 청년들이 강무당에 입학할 때 직접 그들의 신원보증을 서주었던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1968년에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는 공적을 기리어 당계요에게 건국공로훈장(대통령장)을 추서(追敍)하기도 했다.


[사진설명]

최용건의 혁명선배 엽검영,(1927년 광동폭동 당시의 사진)


   통상적으로 “운남강무당”(云南讲武堂)으로 불리는 이 학교의 威名은 황포군관학교(黄埔军校)보다도 훨씬 더 높다. 그것은 황포군관학교의 교관들이 적지않게 이 운남강무당에서 나왔기때문이었다. 중국 홍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덕(朱德)도 이 강무당의 출신(제3기생)이었고, 중국군 10대 원수(元帥)의 한 사람되었던 엽검영도 역시 이 강무당의 출신이었다. 엽검영의 경우 강무당을 졸업한 뒤에는 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는데도 직접 참여했고 교수부의 부주임이 되기도 했다.
   최용건은 강무당 시절의 학장(學長)이었던 엽검영의 주선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왔고, 역시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제5기생대의 구대장이 되었다. 그에게서 훈련받은 학생들속에는 허광달(许光达, 大將), 조상지(赵尚志, 항일연군 제3군의 창건자), 도주(陶铸, 정치가, 중국 국무원 부총리), 송시륜(宋时轮 上将), 장종손(张宗逊, 上将) 등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 최용건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한인 혁명가들이 몇몇 더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사람이 강무당 1학기 선배인 양림(제16기)과 의열단 출신의 유명한 테레리스트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이 세사람은 1930년을 전후하여 모두 함께 만주로 파견받아 나왔다, 1927년 12월에 북만으로 나왔던 최용건이 가장 일찍했다. 오성륜은 1929년에 남만으로 나왔고, 양림은 1930년에야 만주로 나와 잠깐동안 중공당 만주성위원회 군위 서기(제1임)를 맡으면서 주로 동만과 남만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양림이 최용건이나 오성륜보다 1, 2년 늦게 만주로 나오게 된 것은, 광주폭동 뒤에 양림은 소련의 중산대학교에 파견받아가 1년간 더 공부하다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최용건과 운남강무당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주보중은 1931년 “9. 18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나서야 만주로 나왔는데, 이때에 양림이 중공당중앙에 의해 남방의 소베이트 중앙으로  조동되는 바람에, 그의 만주성위 군위서기 직을 이어받았던 사람이 바로 주보중이었다.
   최용건이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갈 때에 주보중은 정잠(程潜)의 제6군 56퇀(연대)에 파견받아 갔었고,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최용건이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2련장(중대장)이 되었을 때에 주보중은 이미 56퇀의 부퇀장이었다. 계속 승승장구하여 새파랗게 젊었던 20대 후반의 나이에 주보중은 벌써 국민당군 제6군의 부사장(사단장)까지 되었으나, 실제로 그의 나이는 최용건보다 2살 연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巨軀였고, 만주에서는 가장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주보중은 경력을 보면 1928년 12월부터 1931년 말까지 소련의 모스크바 국제레닌학원에서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1926년 코민테른에 의해 설립되어 1938년까지 세계 각국에서 유학 온 3천여 명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가르쳤던 이 학교는 전문적으로 노동계급의 역사와 제국주의 정치경제학, 공산주의 이론 등을 가르쳤다.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폴란드의 고무우카,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베트남의 호치민, 미국 사회당 활동가였던 해리 헤이우드가 모두 이 학교 출신이며 , 박헌영, 김단야 등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도 이 학교에서 유학했다. 때문에 주보중은 전문적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용건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비록 최용건을 공산주의자로, 元老級의 중공당원이었다고 보고있지만, 실제로 최용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진정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주보중처럼 전문적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배웠던 적도 없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了解는 아주 淺薄했다. 그를 공산당으로 인도하였던 사람들의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수준도 별개였지만, 당시 중공당에 몸을 담았던 한인들의 主된 주장은 비교적 단순했다. 예하면, 공산주의자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목 표는 전 인류의 해방을 위한 것이다. 같은 피압막 민족으로써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이 이 공산주의 대오에 합류할 수 있었던 이론 적인 근거가 되었던 셈이다. 일단 일제와 싸워 이겨야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일념 하나가 그들로 하여금 공산당을 선택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공산당의 파쟁을 별로 경험하여 보지 못하고 좌익쪽을 선택하였던 한인 청년들 대부분이 비교적 순진했다. 그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국적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 대오에 몸을 담가야만이 더욱 일제침략자를 자기 조국에서 몰아내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을 직접 면담하고 그들의 회고담을 집필하는데 참가했던 당사 학자들이 적지 않게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최용건이 공산주의자라고? 공산주의 ‘공’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식쟁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언제나 무사태평한 얼굴을 하고 다녔는데 그 어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해도 놀라서 긴장해하는 법이 없었다. ......중국에 와서 학교도 다니고 하였지만, 중국글자도 많이 알았고,중국말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는 있었지만 더 없이 서툴렀고, 꺽꺽거렸다. 말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눈을 부라리면서 오른 손을 내 흔들기를 좋아했다. (이때 필자는 중국말에 그렇게 서툴렀다는 최용건이 어떻게 흑룡강에서 중국공산당의 첫 당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는 질문을 드려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흑룡강의 중공당원들은 대부분 한인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가 국제당에 해산되었던 조선공산당의 원래 당원들이었고, 최용건은 그들을 중공당으로 발전시키는데서 크게 한몫 했다. ...... 운남강무당을 나오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노릇까지 하였기 때문에 최용건은 굉장하게 유명했었다. 그때 북만주에는 황포군관 학교 출신 한인 젊은이들이 꽤 많이 나와있었는데, 그들 전부가 최용건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일부는 또한 최용건의 제자들이기도 했다.”

  1929년 6월 12일, 흑룡강성의 아성현(阿城縣) 해구(海購)에서 처음 최용건을 만났다고 회고하고 있는 조선공산당 화요파 출신의 양환준(梁煥俊)은, 그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회의에서 군사부장 김지강(金志剛)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바로 최용건이었다고 술회했다. 최용건은 2중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이때 이미 중공당 북만특위와 연락을 맺고 조직관계를 회복하였던 최용건은, 중공당 조직을 대표하여, 만주총국회의에서 조선공산당인들은 오히려 조선혁명의 성공과 민족독립을 전취하기 위해서라도 중공당에 가입하여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중공당 조직에서는 문을 아주 작게 열었고 개별적으로 충실하다고 인정이 되는 사람들만 10여명을 받아들이는데 그쳤는데, 그들은 모두 최용건의 눈에 잘 보인 청년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최용건의 심복 부하로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중국 정부관방에서 기록(정협문사자료휘편)하고 있는 최용건의 행적을 보면, 만주에 방금 도착하였던 1928년 초, 최용건은 통하현 서북하(通河县西北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최용건의 조직하에 김동원(金东源, 又稱崔水平), 이중건(李中健), 임봉선(林凤善)이라고 부르는 3명의 한인 농민들이 당원으로 발전되어 통하의 첫 중공당 조직이 만들어졌다.  최용건이 종당에는 통하에서도 배겨나지 못하고 요하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던데 대하여, 요하 지방에서 살고있었던 노인들은 “최용건이 처음에는 통하에서 ‘조선족립군’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당지의 한인 유지들이 도와주지 않는 바람에 뜻을 이룰수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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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기병들이 훈련하는 모습


   후에 필자는통하로 답사를 나가는 길에 보청과 탕원 등 지방에도 들렸는데, 최용건의 ”조선독립군“의 꿈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당지의 한인 유지“들이란, 일본특무기관을 등에 업고 운영되었던 ”삼익당“(三益堂)”이라고 부르는 한인 농장의 주주들이었다.
  이 농장을 만드는데 드는 돈의 절반은 일본특무기관에서 댔고 또 통하에서 주둔하였던 한 奉軍장교도 돈을 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지의 한인 농민들이 적지않게 이 농장의 땅을 빌어다가 농사를 짓고 살아가고 있었다. 최용건은 이 농민들을 긁어모아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쫓기게 되었다. 홧 김에 삼익당 건물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던 길에 뒤를 쫓아오는 중국인 기마대 10여명까지도 모조리 쏘아죽였는데, 비록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최용건은 통하지방을 떠났으나, 그의 위명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 되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통하경내의 산림작업소에서 일하다가 후에는 청하임업국(清河林业局)에서 퇴직했던 노인들이 최용건의 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있다. 통하에서 기마대에게 쫓기다가 겨우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며칠을 굶고 길가에 쓰러져 있었던 그를 구해준 왕(王)가 성을 가진 중국인 부자가 있었다. 이 일이 어떻게 와전되다보니 그 왕가 부자는 최용건이 아주 대단한 인물인 것을 보고 자기의 딸을 최용건과 결혼하게 하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일부 기사에서는 그 딸의 이름이 바로 최용건의 중국인 아내 왕옥환이었던 것처럼 쓰고 있으나, 실제로 최용건을 구해주었던 사람은 왕통주(王统州)라고 부르는 중국인 지주였고, 왕통주의 딸은 왕옥환이 아니라 왕옥길(王玉洁)이었다. 왕옥길은 바로 훗날 최용건에게 죽었던 7군 군장 경락정의 아내가 되는 여자다.  



   중매쟁이에, 마당발 여장부를 아내로  


  최용건이 통하에서 쫓겨 탕원 보청지방으로 나올 때 북만특위에서는 이름을 김세일(金世日), 또는 이양춘(李阳春), 서봉산(徐凤山)이라고 부르는 한 한인 당원을 조수로 붙여주었다. 주하현(珠河县) 사람인데 중국말을 중국인들처럼 잘했다. 일찍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려고 광주에까지 찾아갔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던 적이 있어서 최용건을 몹시 숭배하였다. 7군에서 최용건과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정로암은 1938년에 몰래 부하들을 파견하여 최용건의 협력자였던 서봉산을 살해하였는데, 주로는 최용건을 7군 당위원회 서기직에서 끌어내리기 위하여 최용건의 죄목을 긁어모으려고 그랬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때 정로암은 주로 최용건의 생활문제를 추궁하였다.


                
[사진설명]

최용건의 아내 왕옥환(왼쪽)과 주보중의 아내 왕일지
왕옥환은 중국여자였고 항일연군 부녀퇀의 퇀장이었다


  서봉산은 최용건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함구하다가 결국 정로암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정로암은 최용건이 탕원지방에서 활동할 때 한고향 평안북도 태생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젊은 과부와 몰래 동거하고 지냈고, 또 탕원에서 요하로 옮겨왔을 때는 손(孫) 씨 성을 가진 중국인 항일대원의 딸을 그림자처럼 곁에 데리고 다녔다고 길동성위원회에 고발했다. 실제로 최용건이 탕원지방에서 활동 할 때, 그의 조직에 포섭되어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주었던 여성들속에는 확실히 최용건과 같은 사투리를 쓰는 평안도 태생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본명은  김성강이며, “탕원 12열사”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데, 그의 딸 이재덕(李在德)의 회고에 의하면 김성강은 최용건을 만난 뒤에 그의 인도하에서 중공당에 가입하고 탕원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933년에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학립현(鶴立顯)에서 총살당하였다. 또 이재덕은 최용건이 중국말을 아주 잘하였다고도 회고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적지않은 당사 연구가들이 최용건이 데리고 살았던 과부로 알려져 있는 여자가 바로 김성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만 할 뿐 확실한 증거자료는 내놓지못하고 있다. 필자로서는 다만 루머이기를 바랄 뿐이다.
  7군 참모장시절에는 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였던 왕통주의 딸 왕옥길이 부대로 찾아왔다. 처음 최용건과 만날 때 7살 밖에 안되었던 왕옥길이 최용건과 다시 만났을 때는 벌써 16세의 어엿한 처녀가 되었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안에서는 이상한 뜬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고, 40살도 다 된 최용건이 幕舍에서 어린 딸애같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자고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이와같은 내용들을 담은 최용건에 대한 고발편지가 7군을 영도하고 있었던 중공 길동성위원회에 제출되었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최용건을 연구할 때, 우리는 최용건 뿐만 아니라, 항일연군에서 활동하였던 만주의 한인 지도자들이 대부분 여자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던 최용건과 함께 남만주에서 활동하였던 전광도 원체 바람둥이로 소문났었고, 그는 가는곳마다에서 여자를 사귀고 동거하고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동만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빌어가지고 활동했던 김일성(金日成. 卽金成柱, 김성주가 중공당의 결정에 의해 ‘김일성’의 이름으로 고쳐사용하였던 것을 증명하는 양좌청(杨佐青)의 회고담은 다른 기회에 소개한다)의 여자문제는 더욱 황당하기를 이를데 없었다. 우선 그의 본처였던 김정숙을 먼저 데리고 살았다고 고백한, 항일연군 6사 출신의 여영준(呂英俊, 김일성의 부대원, 해방후 중국에 남음)의 이야기는 중국의 연변지방에서 이미 비밀아닌 비밀로 되고 말았다. 여영준은 필자의 취재를 받을 때 “나만 그랬냐, 그때 모두 그랬다.”고 대꾸했다. 여영준은 또 안봉학(安奉學)의 실례도 들었다. 중공당의 연변인물당사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안봉학은, 한인으로써 항일연군 제4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나 생활상 부패문제로 처분을 받게되자 부대를 버리고 혼자 도주하여 일본군에게로 가서 변절해버린 것으로 나와있다. 이에 대하여 여영준 뿐만 아니라, 박춘일, 김명주 등 항일연군의 연고자들은 한결같이 “안봉학이 최현의 아내 김철호와 바람을 피다가 최현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부대도 버리고 혼자 도망했던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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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두산 밀영에서 안봉학을 간호하였던 항일연군 여대원 김철호(왼쪽 두 번째)
왼쪽 첫 번째는 안영의 아내 이영숙, 오른쪽 두 번째는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이다


  안봉학이 부상을 당하고 내두산 밀영에서 치료받고 있을 때, 김철호가 곁에서 간호하다가 상관인 안봉학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또 한편에서는 김철호가 최현 먼저 안봉학과 눈맞아 지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한다. 다시 돌아가 김일성과 결혼을 하고 김정일을 낳았던 김정숙은 원래 인물도 없는데다가 이때 이미 나이도 많았고, 김일성으로부터 찬밥신세가 되어있었다.. 김정숙이 아직 살아있었던 1948년 5월9일(소련홍군의 제2차 대전 전승 3주년 기념일), 김일성은 안길 등 부하들을 데리고 평안남도 성천군의 교외에서 야유를 즐기고 있었다. 바로 여기로 오는 승용차에서 비서였던 김성애(金圣爱, 당시 기술서기국 비서)와 관계를 발생하였던 김일성의 행태가 부하와 운전기사에 의해 밖으로 새어나가고 말았다. 이 사실은 급기가 최용건과 김책의 귀에도 전달되었고, 김책은 크게 화를 냈으나 최용건은 그냥 빙그레 웃어버리고 말았다는 餘談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무렵 최용건의 경호를 맡았던 적 있는 정종길(鄭鐘吉)은 중국의 장춘에서 필자의 취재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성애도 그렇게 이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상당하게 매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범대학교 출신(黄海北道海州郡沙里院女子师范学校)인데 공부도 많이 했고, 비교적 신식 여자였다. 김성애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여자는 당시 최용건의 밑에서 작전국장으로 있었던 김광협의 여동생이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처음 군복을 입은 김성애를 봤을 때 견장을 보니 상사견장을 달고있었다. 처음에 보안국(보안국장이 최용건)의 타자원을 하다가 김일성의 눈에 들어 내각으로 조동되었는데, 듣기로는 최용건의 부인 왕옥환이 김성애를 김일성에게 붙여주었다고도 하더라. 확실한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던 그날 김성애를 곁에 앉히고 야외로 놀러나가던 김일성이 승용차 앞좌석에 운전기사와 경호원을 그대로 둔 채로 뒷 좌석에서 김성애를 무렆에 앉히고 관계를 가졌는데, 김성애가 임신하게 되자, 이번에도 또 최용건의 아내 왕옥환이 나서서 김성애와 정식 결혼을 하고 데리고 살라고 추겨붙였다. 말하자면 중매쟁이 역할을 했던 셈이다.”

  왕옥환이 항일연군에서 중매를 잘 섰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녀퇀(연대)의 퇀장(연대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대원들은 전부가 여자들이었다. 마당발에 키가 컸고, 목청도 높았던 왕옥환은 남자들 못지않게 말도 잘 타고 다녔다. 주보중의 소개로 최용건과 결혼하였는데, 항일연군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팔녀투강’(八女投江)의 여대원 8명이 바로 왕옥환의 부녀퇀 대원들이었다. 부녀퇀 대원들의 혼인문제에 있어서도 왕옥환은  생살권까지 갖다시피 했다. 그 횡포의 정도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면, 남편 최용건과 루머가 나돌았던 어린 여대원 왕옥길을 남편의 경쟁자였던 경락정과 결혼시켜버린 것이었다. 그때 경락정은 이미 유부남이었다. 그러고나서 경락정이 또 최용건에게 총살당하자 이번에는 임신중 출산을 앞두고 있었던 왕옥길을 최용건 수하의 장자여(张子余)라고 부르는 하북성(河北省) 천진(天津)출신의 한 절름발이 대원에게다가 거의 강제다싶게 주어버리기도 했다.


[사진설명]

경락정의 아내 왕옥길(오른쪽 두 번째), 딸 경국청(왼쪽 첫 번째)
진뢰(왼쪽 두 번째)와 그의 아내 리민(오른쪽 첫번째, 1994년 4월13일에 촬영



  남편 최용건을 따라 북한으로 갔던 왕옥환은 그때 김정숙까지 다 포함하여 항일연군 출신 여대원들의 큰 언니역을 하고있었다. 우선 남편이 북한군의 총사령관인데다가 여대원들의 남편이 모두 최용건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인 것도 있겟지만, 우선 왕옥환 본인이 살아남았던 항일연군 출신의 여성들속에서 제일 직위가 높았던 부녀퇀 퇀장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성애가 정식 결혼을 선포한 것은 김정숙이 죽고난 뒤에도 한참 지난 1954년의 일이다. 실제로 김일성과 김성애를 추겨붙였던 사람은 왕옥환이 아니고 당시 김일성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박정애(朴正爱)였다. 김성애가 임신까지 한 사실을 알고도 처음에 김일성이 쉽게 결혼을 선포하지 못하였던 것은 김정숙과 친했던 항일연군의 여대원들이 모두 평양에 있었고 그들이 난동을 부릴가봐서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박정애는 여대원들의 큰 언니 격인 왕옥환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왕옥환과 최용건의 만남은 그야말로 중국말로 표현하자면 “英雄配美女”(영웅의 배필에는 미인) 아니라 “英雄配女俠”(영웅의 배필에 여협객)었던 셈이다. 주보중이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으로 여성 장부였던 왕옥환을 자기가 갖지 않고 최용건에게 붙여주었던 것은, 최용건에게도, 그리고 훗날 창건되는 7군에도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용건을 항상 좋지않게 보고있었던 중국인 간부들 대부분이 왕옥환의 威勢에 눌렸다. 그때로부터 최용건에 따라붙었던 “협애한 민족주의”, 또는 “파쟁성견”이라는 죄목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조선독립군”의 대장에서 제7군의 창건자로


  1930년 3월, 중공당 만주성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요하현위원회가 성립되었다. 그동안 줄곧 당무(黨務)를 맡았던 최일산(崔一山)에게 서기직을 맡겨버리고 최용건은 서봉산(徐鳳山, 卽李陽春)과 함께 보청의 소성자(小城子)에서 군정훈련반을 만들었다.
  
  “최용건의 꿈은 자나깨나 ‘조선독립군’을 만드는 일이었다. 훈련반에는 대부분 한인 청년들이 참가하였고, 그 자신은 한국말로 연설하였다. 중국인 대원들이 몇 명 없었기에 그들에게는 별도로 서봉산이 번역하여주었지만, 최용건의 말을 제대로 다 번역하지는 않았다. 최용건은  ‘장차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군대는 ’조선독립군‘이다. 우리가 공산당원이 되고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고 있는 것도 목적은 하나다. 바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내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서다.’라는 말을 자주했는데, 서봉산이 제대로 번역을 해주지는 않았어도 학생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중국인 학생들의 귀에 내용이 전달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1932년 가을에 정식으로 성립되었던 “요하유격대”의 원래 명칭은, 그동안 관방 자료들에서는 줄곧 “특무대”로 소개되어 왔으나, 계청(季淸) 등 생존자들은 “특무대”가 아니고 “조선독립군”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특무대의 첫 대원들 전원이 한인들(최용건까지 포함하여, 金文享、金东天、崔龙锡、许成在、朴英根)이었고, 이듬해 1933년 6월에는 구국군 고옥산(高玉山)의 부대가 요하를 점령하였던 때를 타서 이 특무대는 60여명의 대원들로 확충되었는데, 부대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게 되자 최용건은 공개적으로 “조선독립군”이라는 깃발을 내걸기까지 하였다.
  이는 최용건이 비록 중공당에 몸을 담았지만, 정작 그의 이상과 꿈은 철저하게 “조선독립”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기도 한다. 최근에 새롭게 편찬되어 나오고 있는 중국 정부 관방의 사료들에서 “동북항일연군 7군의 沿革”을 서술 할 때에 공개적으로 최용건과 서봉산 리학복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들었던 무장부대가 “조선독립군”이었으며, 이 독립군이 나중에 요하유격대로 다시 개편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최용건에 의해 순수 한인들 일색으로 뒤덮였던 요하지방의 중공당 조직에 중국인들이 대대적으로 참가하게 된 것은, 고옥산의 구국군으로 잠복하여 몰래 조직원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북만특위 서기 소매(苏梅)가 구군군의 문서 참모로 있었던 정로암과 여단 참모장 하진화(夏振华)를 포섭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후 관동군 제10사단이 요하를 바라고 밀려오자 고옥산은 미리 당해내지 못할줄 알고 소련경내로 철퇴하였는데 이때 고옥산을 따라가지 않고 요하에 남았던 중국인 대원들이 정로암을 따라 모조리 최용건의 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중국인 대원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최용건의 “조선독립군”도 더는 “조선독립군”이라는 이름만 달고 활동할 수는 없게 되었다.
  7군이 성립되면서 군장 자리를 놓고 최용건에게 불복하는 중국인 간부들이 여럿 나타났다. 정로암은 두말할 것도 없고 1934년 최용건의 부대와 합류하였던 원 동북민중구국군 1旅(여단) 1營(대대) 영장(대대장) 경락정이 데리고 대원수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최용건과 리학복이 60여명밖에 안 되는 “조선독립군”을 이끌고 다닐 때 경락정은 벌써 동북반일연합군 제5군의 군단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라서 4퇀 2사로 개편되었을 때 경락정은 어렵지않게 3사 사장자리를 차지하였다. 대원수가 많다는 것을 턱대고 참모장이었던 최용건에 자주 불복하였는데, 그것은 주요하게 권력욕심 때문이었다고 연고자들이 말하고 있다.

  특히 계청은 회고록에서 “왕효명이 말하기를, 경락정 이 사람의 특점은 마음이 옹졸하고 지독하며, 항상 사람들의 상상밖의 일을 잘 만들어내군 하는데, 별로 특별하게 뛰어난 재간이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작 중국 정부 관방에서 보관하고 있는 “경락정의 역사자료”(松坡关于景乐亭的历史材料)에서는, 경락정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밝혀놓고 있다. 또 이 기록에 의하면,  일찍 일본군의 경찰대대에서 부대장으로 노릇을 하였던 적도 있었던 경락정은 대장과 권력 다툼을 하다가 일본군 헌병대로부터 문책을 받기도 했고, 끝내 대장에게 쫓겨 경찰대대에서 나와 호림과 요하 지방에서 건달노릇을 하며 떠돌아다녔던 적도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2000년 7월 경락정을 ‘항일혁명열사’로 재차 인정하고나서부터는 경락정의 약력안에서는 이 방면의 한단락은 써넣지 않고 있다.
  1937년 3월 최용건은 리학복이 없는 7군의 군장대리 직을 잠깐동안 맡았다. 그러나 7군을 영도하고 있었던 하강특위가 정로암(하강특위 서기를 겸직)의 손에 들어가있었고, 주보중이 길동성위원회의 이름으로 파견하여보낸 하강 특위 3인단도 7군의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락정을 군장으로 추대하는데 동의하고 말았다. 정로암이 최용건 대신에 경락정을 군장으로 올리 밀었던 것은, 경락정에 대하여서는 언제든지 끌어내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최용건이 군장자리에 그대로 눌러앉는 날에는 정로암에게는 그야말로 큰일 날 일이었다. “나영간첩사건”을 처리하는 최용건의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는 정로암은 최용건을 몹시 무서워하였는데, 정작 최용건을 밀어내고 군장자리에 올랐던 경락정은 정로암과 손을 잡을 대신 불이나케 최용건과 손을 잡고 제일 먼저 정로암을 치기시작하였다.


[사진설명]

항일연군 제7군의 2임 군장 리학복


  정로암은 나이도 오히려 최용건보다 4살이나 더 많았고, 또 7군이 아직 창립되지 않고 4군의 2사로 편입되어 있을 때, 정로암은 사장으로써 부사장이었던 리학복과 참모장 최용건의 상사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순수한 한인들로만 조직되었던 최용건의 “조선독립군”은 바로 이 정로암이 한때 요하를 점령하였던 구국군 고옥산의 부대에서 중국인 부하 30여명을 데리고 탈출하여 최용건의 부대와 합류하면서 대원 구성이 한 중 혼합부대로 바뀌게 되었다.
  요하의 “조선독립군”이 결국 요하반일유격대로 명칭을 바뀌게 된 근본적인 원인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로암은 말단 평대원들만 30여명을 데리고 왔을 뿐, 구국군대원들을 공산당의 부대로 교육시키기위하여서는 지어 소대장, 분대장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한인 당원들이 배치되었다. 유격대가 점차적으로 커가면서 250여명의 대오로 불어나고 편제상 4군 4퇀으로 개편될 때에 정로암은 한때 최용건에 밀려 부대를 떠나기도 했다.
  부대의 인사권을 모조리 틀어쥐었던 최용건은 4퇀이 2사로 다시 재편성되기 직전, 부대의 모든 주요 직책에다가 자기의 부하들만 배치하였는데, 그들은 전부가 한인이었다. 그들로는 이름만 봐도 한인들인 것을 알수 있는바, 그들속에는 해방후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군의 중장, 대장이 되었던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리학복(퇀장), 박진우(부퇀장), 이두문(정치부 주임), 최석봉(정치부 부주임), 최영화(당위원회 비서장), 현영학(군수부장), 김용화(제1련 련장), 최용진(보안련 련장), 이들 전부가 한인들이었고, 최용건이 군정훈련반 시절부터 직접 가르치고 키웠던 부하들이었다.


[사진설명]

항일연군 제7군의 3임 군장 경락정

  그런데 1936년 3월 4퇀이 2사로 다시 편성될 때 최용건에게 밀려 요하현위원회로 조동되어 조직부장 직에 있었던 정로암이 정치부 주임으로 온 것이었다. 한인이 일색으로 뒤덮인 4퇀의 지도계층에 중국인 간부들이 너무 적은 것을 보고 길동성위원회와 하강특위에서는  한, 중 민족간의 간부 비율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정로암을 최용건에게로 다시 파견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던 서봉산이 이 때문에 요하중심현위원회 서기직에서 밀려나 주보중의 제5군으로 조동되었으나, 그는 5군에 가서 부임하지 않고 뻗히다가 결국 정로암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虎林县志, 440페지)서봉산이 누구였던가, 최용건이 만주로 방금 나왔을 때부터 그를 도왔던 최초의 동지였다. 중공당이 요하지방을 개척하는데 앞장에 서서 궂은 일 마른 일을 가리지 않고 해왔던 서봉산은 중국동네 툰장으로 있었던 리학복을 중공당으로 끌어들였던 혁명의 인도자(引路人)이기도 하였다. 서봉산은 현위원회 서기직에서 물러난 뒤 최용건을 만나 정로암이 자기의 동의도 없이 최용건을 고발하는 편지를 길동성위원회에 보낸 일을 알려주었고 또 정로암이 현위원회에서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조옥순(赵玉顺, 乳名小秋子)이라고 부르는 한 중국인 과부의 집에로 몰래 드나드는 것을 보고 제보가 올라왔던 적도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서봉산이 정로암에게 살해당한 뒤 최용건은 이영호와 장동식을 시켜 정로암을 미행하였는데, 아닌게 아니라 밤마다 조옥순의 집에로 드나드는 것을 발견하였다. 최용건이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고 정로암을 잡아들이려고 하였으나 리학복이 말렸다.

  “군장과 참모장이 다 한인이고 정치부 주임만 중국인이었던 7군 군부에서 이 정치부 주임을 몰아내는 일이, 리학복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리학복은 진영구가 죽고 제2임 7군 군장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또 리학복을 7군 장으로 적극 추천한 사람도 바로 정로암이었다. 정로암으로서는 최용건보다 성품이 중후하고 중국인들이 모두 좋아하고 따르는 리학복이 군장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그런데 이때 최용건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운 것은 정로암을 빠지게 만들었던 이 여자가 혹시 일본군 특무가 아닐가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잖아도 진영구가 죽고 나영이 일본군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에, 최용건은 좀 더 지켜보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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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 3인단 성원으로 7군에 파견되었던 계청


  최용건은 이영호와 장동식을 보내어 정로암의 정부(情婦) 조옥순을 잡아다가 신임 군장 경락정의 앞에 바쳤고, 경락정은 별도로 심사도 하지않은채로 당장 밖에 끌어내다가 죽여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정로암이 총까지 뽑아들고 경락정에게 달려들었으나, 군부 경위부대가 전부 최용건의 말만 듣는 한인들이어서 정로암은 눈깜짝할 사이에 무장해제를 당하고 말았다. 최용건은 이때다싶게 불쑥 앞에 나서면서 “그러면 네 손에 억울하게 죽은 서봉산이와 필옥민은 심사를 받아본 적이 있었더냐.”고 꾸짖고는 정로암에게 포승까지 지웠는데, 그날로 7군 당위원회를 소집하고 정로암의 직위와 당적을 제명한다는 처분을 내려버렸다.
  정로암은 그날로 제2로군 총부로 압송되었는데, 최용건이 만들어서 한바탕 덮어씌웠던 정로암의 죄목은 불분명한데가 많았다. 또 정로암과 동거하고 지냈던 조옥순이 일본군의 간첩인지 아닌지도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한 상황에서 다짜고짜로 죽여버렸기 때문에 주보중은 1939년에 정로암의 당적을 회복시키고 제2로군에 남겨 총지휘부에 남겨 선전과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7군의 문제가 상당하게 엄중한 것을 보고 주보중은 심복 부하였던 계청을 재차 7군에로 파견하였는데, 그때 계청은 주보중에게서 받았던 구두 지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7군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상 간단하다. 최석천이 군장이 되면 아무 문제도 없이 다 잘 풀릴 수 있다. 생각해보라. 최선천이 어떤 사람인가.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처럼 매일같이 일본군 토벌대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최선천같이 군사재능이 월등한 지휘관이 자기 자리에 앉지 못하고 경락정이나 정로암같은 사람들의 밑에서 뒷바라지나 하게 됐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7군이야말로 최석천이 만든 대오인데, 최석천을 밀어내고 생뚱같은 사람들이 자꾸 자기 자리가 아닌 자리에 올라앉으려고 해서 이 사단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강 3인단이 이번에 가서 이 문제를 확실하게 잘 해결하기를 바란다”

  주보중은 7군을 최용건에게 통째로 맡겨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이와같은 내용의 지시를 주보중으로부터 받은 계청은, 7군 군부가 자리잡고 있었던 호림현의 토정자(土顶子)에 와서 7군 특별당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이 회의에서 계청과 함께 7군으로 돌아온 정로암이 먼저 리학복이 소련으로 병치료를 간 뒤에 잠깐 동안 군장대리직에 올랐던 최용건을 제멋대로 군장대리직에서 내려오게 하였던 것은 잘못 된 처사였다고 검토하였다.
  7군의 군급 지휘관에 대한 인사권이 하강특위에 없고, 제2로군 총부와 길동성위원회에 있음을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또 이 회의에서는 1938년 11월에 진행되었던 하강당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열렸던 모든 결정을 취소한다고 선포하였고, 경락정의 제7군 군장직은 제2로군의 총부 승인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취소하고 정식으로 길동성위원회와 제2로군 총지휘부의 결정하에 최용건을 제7군 군장 겸 당위원회 특위서기로 임명하였다. 정로암의 정치부 주임직도 이때 정식으로 취소한다고 선포하였고, 1년전 정로암과 함께 최용건을 군장대리 직에서 끌어내렸던 하강 3인단의 책임자 포림(鲍林)은 7군 3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7군의 진정한 창건자 최용건이, 7군이 창건된지 3년만에 드디어 군장자리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뿐만 아니라 주보중은 최용건이 정치부문 계통의 간부들 때문에 골칫머리를 앓는다는 것을 감안하고 특별히 왕효명을 7군에 남겨 군 정치부 주임대리직을 맡게하였고 전폭적으로 최용건을 도와 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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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효명(오른쪽 첫 번째), 팽시로(왼쪽 두 번째), 왕윤성(왼쪽 첫 번째), 주보중(오른쪽 두 번째)


  1991년까지 살아남아 중국해방군에서 장군이 되었던 왕효명은 주보중의 최측근이었고 가장 믿는 심복부하나 다를바 없었다. 주보중이 항일연군 제5군을 창건할 때 말단 참모로부터 출발하여 교도대대 대대장과 2사 참모장을 거쳐 이때  7군으로 파견받아와서는 최용건의 밑에서 군 정치부 주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최용건이 7군 군장과 제2로군의 총참모장까지 겸직하게 되었을 때도 최용건을 따라다니면서 제2로군의 부총참모장이 되기도 했다.
  

  ‘나영 간첩사건’과 진영구의 죽음, 및 최용건의 독선과 횡포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흑룡강성 경내안에 적지않게 생존하여 있었던 항일연군의 연고자들은 7군과 최용건에 대하여 회고할 때, 조만해서 그의 문제들을 입밖에 내놓지 않았다. 북경에서 팽시로를 취재하였던 한 당사연구가는 연구부문의 위탁을 받고 팽시로(彭施鲁)의 회고담을 2개의 판본으로 만들어 한 편은 당 조직부문에 맡겨 보관하고 다른 한편만 공개하였는데 팽시로가 직접 “7군의 실질적 권력자였던 최용건은 생활상에서 아주 부패하였고, 중국인과 한인들 사이에서 한인들의 역성만을 들고 중국인들은 무작정 탄압하는 파쟁성견이 아주 농후한 영도간부였다.”고 고발하는 편지를 길동성위원회에서 받았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길동성위원회에서 함부로 최용건을 처분하지 못하였던 것은, 최용건이라면 무작정 싸고도는 주보중때문이었던 것도 있겠지만, 북만주의 경우 중공당과 군대의 고위층 간부들이 대부분 한인들이었던 것과도 무관하지않다.
  이를테면 동만의 한인 당원들이 특무, 또는 변절자로 몰려 무더기로 잡혀나와 사형당하기도 했던 “민생단”의 여파가 후에는 북만에까지 몰아왔었고, 6군의 중국인 아편쟁이 군장 하운걸(夏雲杰)의 손에 몇몇 한인 대원들이 피해를 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6군의 기간부대인 1사 사장 마덕산(馬德山, 한인 김승호의 별명, 최용건이 직접 배양한 제자)을 아주 무서워하였던 하운걸은, 더 이상 한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느날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7군이 창건될 때 진영구(陈荣久)가 고향인 녕안현 동경성에서 직접 데리고 왔던 한인 청년 장동식과 김원준(金元俊)이 경위원으로 임명되었던 적이 있었다. 3사 7퇀의 정치위원이었던 이영호가 장동식을 욕심내어 자기가 데리고 있고싶었으나 방법이 없어 최용건에게 부탁했더니 “네가 달라고 하면 진영구가 말을 듣겠느냐, 내가 달라고 해서 먼저 데리고 있으마.”하고는, 자신의 경위대원 후배림(侯培林)을 진영구에게 보내고 장동식을 바꿔왔는데、정작 진영구와는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해버렸다.

  “하루 아침에 자기의 경위원이 전혀 모르는 얼굴로 바뀌운 것을 보고 진영구가 어리둥절하여 최용건에게 물었더니 최용건은, ‘참모장인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딱 한마디로 면박을 주어버렸다. 진영구는 억지로 참으면서 ‘참모장이 함부로 군장의 경위원도 제맘대로 바꿔치기 하는가’고 좋아하지 않으니 ‘小張(장동식을 이렇게 불렀다)은 녕안에서 온 대원이라, 여기 지방에 익숙하지 않고 새로 결정한 小侯(후배림을 이렇게 불렀다)은 요하 사람이라 군장인 당신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그렇게 결정한 것인데 무엇을 그렇게 불쾌해하느냐.’며, 이번에는 최용건 쪽에서 더 좋아하지 않는 낯빛을 보이니 진영구도 더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7군에서 최용건의 위세가 이렇게 대단했다.”

  장동식은 1945년 일본이 투항한 후, 직방 북한으로 나가지 않고 김광협과 함께 목단강으로 나왔다. 연변의 왕청지방에서 아주 창궐했던 토비 마희삼(馬喜三)을 숙청하는 전투를 장동식이 직접 지휘하였는데, 그의 부대 제4퇀 4영에서 토비숙청에 참가했던 생존자들은 장동식이 대원들과 아주 잘 어울렸는데, “내가 최용건이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1937년 봄, 진영구가 군부에 비서로 잠복했던 목단강 일본헌병대의 간첩 나영(羅英)의 꾀임에 들어 요하현 소남하 천진반 근처에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던 사건은 7군, 나아가 항일연군의 역사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나영은 원래 4군 2퇀의 정치부 주임이었고, 4군의 군 정치부 주임 하충국이 죽으면서 임시로 그 자리에 올랐던 인물인데, 길동성위원회에 사업회보를 하려고 목단강에 들어갔다가, 목단강 거리에서 한 변절자와 맞다들려 신분이 폭로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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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를 쳐들고 변절하러 나온 항일연군들


  “원래 이 변절자는 4군 3퇀의 기관총수였다. 3퇀 퇀장 소연인(苏衍仁)은 항일군의 역사에서 “소백룡”(小白龍)“으로 불리는 산림대 출신의 유명한 항일영웅이었다. 후에 4군 3퇀으로 개편된 이 부대는 4군 군부의 결정에 의해 벌리현의 청룡구에서 나무세를 걷우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이 지역을 지나가던 제3군의 군장 조상지의 부대에게 붙잡혀 통째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소연인은 조상지에게 대들다가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소연인의 4군 3퇀은 인원수가 3백여명에 달하였지만 조상지가 데리고 왔던 부대는 3군의 주력부대인데다가 인원수가 5백명 가까웠다. 4군 3퇀은 1백여명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나머지 2백여명은 손에 무기들을 든채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져버렸는데, 목단강시내로 내려가 일본군에게 투항하고 일본군의 토벌대에 편입된 자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이자들의 제보로 잡힌 나영은 일본군 목단강특무기관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7군이 4군과 멀리 떨어져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였다. 나영이 자청하고 7군으로 잠복하자 목단강특무기관에서는 특무기관 요원이었던 일본군 소위 다이스이 히사오를 요하현 참사관의 신분으로 파견하여 나영과 합작하게 하였다. 드디어 나영으로부터 7군 군장 진영구가 직접 요하현 소남하 천진반(小南河天津班)일대로 온다는 정확한 날자가 시간, 장소까지 전해받은 다이스 히사오는 요하현 경찰대대장 원복당(苑福堂)과 함께 300여명의 일 만 군경들을 거느리고 거느리고 진영구의 7군 군부 직속부대 150여명을 겹겹이 둘러싸고 공격하여 올라왔다.”

  이는 1990년대 중국 해방군 문예출판사에서 발행한 “동북항일전쟁실화총서”에서 처음 공개하고 있는 자세한 내용이다. 조상지가 제일 처음 誤殺하였던 항일장령은 11군 군장 기치중이 아니고 소백룡으로 불렸던 소연인이 먼저였다. 이 사건 직후 최용건은 불이나케 나영을 잡아냈다. 최용건은 일본군이 항일전사를 묶어놓고 혹형을 가하는 것 못지않게 나영을 거꾸로 달아매놓고 직접 장작개비로 죽도록 잡아팼다고 한다. 나영이 대들보에 매달린지 2일만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다 털어놓자 그길로 끌어내다가 총살해버렸다.
  최용건은 사람을 보내어 진영구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경위대원 김원준과 후배림의 시신 밑에 깔려있었다. 당지 구국회의 도움으로 세사람의 시신을 천진반 구병령沟屏岭) 뒷산에 묻었다가 후에 다시 이장하였다.


  일제의 꼬임에 들어 경락정을 錯殺


  “경락정이 7군 군장직을 최석천 참모장에게 내놓게 되었을 때, 최석천참모장은 경락정을 7군 군부안에서 깨끗하게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총부 주보중 총지휘의 의사에 따라 경락정을 7군 당위원회 위원으로 유임시켰고, 필요한 때 따라서 여전히 경락정이 다시 7군의 군부에서 주요한 영도업무를 맡아줄 것을 바랐다. 이때 벌써 주총지휘는 최석천참모장에게 제2로군의 총참모장을 맡길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총부 참모장을 맡게 되면 7군은 다시 경락정에게 군장대리직을 맡기려고 미리 대비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것이 결국 경락정을 더욱 사경으로 몰아가게 만들 줄은 몰랐다.”

  최용건이 경락정을 총살하는데 깊이 관여했던 왕효명은 물론이고, 팽시로, 계청 등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이 모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이에 앞서 1937년 경락정은 3사 사장으로 있을 때 위만군부대의 한 기관총중대를 의거시키려고 작업을 펼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밀사업을 잘 하지 못하여 사단 내의 연대장 이상 간부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3사 기층부대에 잠복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한 스파이가 이 정보를 빼내어 일본군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에 의거하기로 하였던 위만군부대가 모조리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진압당하였고, 경락정 본인이 그런줄도 모르고 이 의거부대를 마중하러 나갔다가 하마터면 생포될번했던 적이 있었다.
  군장직에서 내려앉은 뒤 군수(軍需) 부대 한 개 중대를 데리고 군부 밀영에서 고기잡이도 하고 밭도 일구면서 부대가 월동(越冬)하는 일을 돕고있었던 경락정은 이때 호림에서 멀지않은 소만국경을 지키고 있었던 변경수비퇀(边境守备团)의 퇀장이 자기와는 한 고향 산동사람인 것을 보고 그를 의거시키려고 찾아가 몇 번 만나기도 하면서 몰래 물밑작업을 펼쳐오고 있었다. 이 일에 가담했던 7군 경위소대장(警衛排張) 단립지(单立志)가 해방후에 살아남았고 2009년 7월에 당사 연구가들의 취재를 받았다.

  “원래 원칙대로라면 이런 사실을 군부에 회보하고 또 최석천군장의 동의도 얻어야 했다. 그런데 위만군을 의거시키려다가 비밀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크게 골탕을 먹었던 적이 있는 경락정은 이번만큼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고 군부내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 일은 나와 경락정, 그리고 불행하게도 정로암이 알고있었는데, 이 정로암이 갑자기 일본군에게 잡혀 이 사실을 모조리 불어버릴줄은 몰랐다.”

  호림현의 소만국경은 소련으로 통하는 국경 요도였고, 7군 뿐만 아니라 만주의 항일연군 부대가 이 요도를 많이 이용하였다. 그런데 이 의거가 실패로 돌아간 뒤 7군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 변경수비퇀이 갑자기 일본군 부대로 교체되는 바람에 최용건은 경락정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직접 사람을 보내여 경락정을 2로군 총부로 데려와서 수차례 따지기도 하였다. 확실한 증거를 잡지못한 상황에서 최용건은 경락정을 데리고 직접 7군 군부로 돌아오는 길에, 부대가 숙영할 때마다 경락정의 주변에 따로 모여앉아 자주 수근덕거리고 있는 이덕산(李德山)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최용건은 군부로 돌아오자마 이덕산부터 잡아가두고 왕효명과 함께 그를 밤새도록 족쳐댔다.
  결과 이덕산의 입에서 엄청난 비밀이 쏟아져나오고 말았다. 경락정이 이덕산을 포함한 부하 장영희(张荣喜)、예덕발(倪德发)、막성상(莫成祥)、송수청(宋秀清)、우명례(于明礼)、정수운(郑秀云)、왕옥길(王玉洁) 등 여덟사람과 함께 항일연군을 떠나 일본군에게로 넘어가자고 이미 모의를 마쳤으며, 일본군에게 바칠 선물로 최용건의 머리를 가져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최용건은 어떻게나 놀랐던지 당장 경락정을 총살해버리려고 하였다. 왕효명은 “일단 경락정을 연금만 시키고 제2로군 총부에 회보하여 주총지휘의 결정을 받아보자.”고 백방으로 말렸으나 최용건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최용건과 왕효명은 각자 명의로 편지를 한통씩 써서 장동식에게 시켜 주보중에게로 전달하였을 뿐이었다. 1940년 3월26일, 최용건은 왕효명과 함께 호림현 독목하진(独木河镇) 소목하촌(小穆河村) 서북쪽에서, 항일연군 제2로군 총부 대표의 신분으로 경락정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곧바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천고의 怨案이 밝혀지다

  “심사를 거쳐 경락정이 일본군에 투항하려고 하였던 사실이 밝혀졌고 인증(人证)이 확실한 상황에서 경(景, 卽景乐亭) 본인도 더는 변명하지 못하였다.(景无词抵赖) 그리하여 왕효명, 최석천의 사회하에서 하급인원들이 대표로 참가한 심판회의를 소집하고 경락정을 사형에 언도하였다. 사건이 원체 엄중하므로 반드시 총부에 보고하고 처리하여야 하였으나, 당시의 적정이 상당히 엄중한 상태에 있었고, 또 부대 내부의 고난도 많았다. 특히 부대는 식량이 떨어졌고, 경락정을 총부로까지 압송하여 심사를 받으려면 많이 시간이 걸리므로 이 사이에 의외에 사건이 다시 발생할 수 있음을 감안하여 재차 토론결과 이미 경의 죄행이 폭로되고 증거도 확실한 상황에서 반드시 긴급하게 처리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여 3월26일, 경락정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것은 중국 정부관방에서 공개하였던 “동북혁명역사문건휘집 57권 ‘西返经过纪要’”에서 기록하고 있는 부분 설명이다. 그런데 경락정이 사형당한지 71년, 경락정을 사형하였던 최용건이 죽은지 35년 흐른 2011년 3월, 중국 정부는 흑룡강성의 할빈에서 일제 시대의 적위당안(敌伪档案)을 사열(查阅)하다가, 만주국 무원현공서(抚远县公署) 당안에 기재되어 있는 이덕산의 비밀을 파내게 되었다. 일본어로 된 이 기록에, 이덕산의 본명은 양덕산(杨德山)이며 만족인(满族人)으로써 “潜伏组首谋者”(일본어)로 드러났다. 이 당안에 의하면 당시 최용건을 암살하기 위하여 7군에 잠복하였던 일본특무기관에 고용되었던 간첩들이 이덕산 외에도 또 원조천(袁兆天)、장모(张某)、진모(陈某) 등 네명이나 더 있었다. 최용건이 자기의 목을 베는 임무를 맡고 들어왔던 진짜 일본군의 간첩은 하나도 못 잡아내고 죄없는 경락정만 억울하게 錯殺하고 만 것이 밝혀진 셈이다.
  비록 이 원안의 전모는 2011년에야 밝혀졌지만, 오래전부터 경락정은 비교적 억울하게 총살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그런데 경락정보다 더욱 억울한 것은 최용건에 의해 경락정에게 시집갔던 왕옥길이었다. 항일연군이 소련경내로 이동한 뒤에 최용건과 왕옥환을 찾아왔던 왕옥길은 왕옥환으로부터 “너의 남편이 죄를 짓고 이미 총살당했으므로 너는 즉시 이혼을 선포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가야 한다.”는 권고를 받게 되었다. 당장 출산을 앞두고 두 번째 남편 장자여와 만난 왕옥길의 운명은 불행에서 불행의 연속이었다. 이미 경락정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던 왕옥길은 출산 3개월을 앞두고 두 번째 남편 장자여와 결혼을 했으며, 경락정의 아이를 낳은 뒤에는 다시 또 두 번째 남편의 아이도 하나 더 낳았다.
  1995년까지 살았던 왕옥길은 주보중과 최용건에 대하여 회고할 때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하고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이 모두 조국으로 돌아갈 때도, 누구도 왕옥길과 그의 남편 장자여에게 같이 돌아가자고 권고하였던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중공 당중앙을 대표하여 만주에로 나왔던 진운에게 동북항일연군 생존자들의 명단과 그들의 조직관계 당안을 전달하였던 주보중과 최용건은 유독 왕옥길과 장자여의 이름을 빠뜨렸다. 고의적으로 빠뜨렸는지 아니면 부주의로 빠뜨렸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1949년 이후, 중국 정부에서는 항일연군의 참가자들에게는 홍군간부 대우를 해주었고, 급별(級別)에 따라 직책, 주택, 건강치료 등 여러면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본인들 외에도 자식들까지도 모두 여러 가지의 영예를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남편을 억울하게 잃은 왕옥길은 남편 경락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경국청(景菊青)의 손을 잡고 항일연군에서 알고지냈던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도 항일연군의 참가자라는 사실과 자신의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신원(伸寃)받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까지 해결받지 못하였다. 1950년 6. 25 한반도 전쟁 이후, 북한의 국가수반이 된 최용건이 한번씩 북한대표단을 거느리고 중국에 방문올 때면, 중국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인 모택동, 유소기, 동필무, 주덕, 주은래 등 사람들이 최용건을 마중하고 배웅하고, 또 중간에 모시고 같이 찍는 사진들이 중국의 신문들에서 모조리 도배를 하다시피 할 때, 누구도 나서서 최용건에게 총살당하였던 경락정의 이름자조차 입에 담기를 꺼렸다.
  결국 왕옥길은 1995년 3월 홧김에 갑자기 쓰러졌는데 심근경색으로 죽고말았다. 죽고난 뒤에서 중국 정부에서는 왕옥길을 혁명열사릉에 묻어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16세의 나어린 나이에 항일연군에 참가하였다가 죽고나서 받은 최후의 보상이 이것인 셈이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정로암과 그의 말로


  필자는 1980년대부터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만나기 시작하였는데, 진짜로 공산주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방후 주로 중국의 연변에서 살았던 한인출신의 항일연군 생존자(중국에서는 조선족 항일투사로 불렀다)들에게, 중공당의 항일연군에 가입하여 일제와 싸웠던 것은 과연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였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같이 앙천대소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무엇이냐. 우리는 그런 도리를 몰랐다. 우리를 입당하라고 추겨붙였던 사람들이, 나라를 찾고 싶어도 독립군이 다 사라지고 없는데 어디 가서 누구와 함께 왜놈들과 싸우겠느냐, 지금은 공산당이 왜놈과 싸우고 있으니 우리도 왜놈과 싸우려면은  일단 공산당에 가입하고봐야 한다. 먼저 중국 땅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일본군을 몰아내야만이 우리 나라도 함께 독립되고 나라도 찾을수 있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후에 동만에서는 이런 말을 하다가는 중국인들한테 다 잡혀 죽었다. 중국인들은 쩍하면 우리 한인들을 왜놈 특무로 몰았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동만에서는 한인들이 많이 당했지만, 남만이나 북만에서는 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항일연군 시절의 최용건은 어디를 뜯어보아도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던 가장 전형적인 군인의 한사람이었다. 만주 북부 대지에서 항일의 불길을 지펴올렸던 최용건은 운남강무당과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운 군사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중국인들로부터 인정받았고, 중공당내 중국인들과의 권력다툼에서도 끝까지 지지않고 최후의 승자로 될 수 있었다. 7군 군장자리를 놓고 최용건과 경쟁자였던 경락정 뿐만 아니라, 정로암까지도 모두 최용건의 손에 죽고말았다.
  1939년 10월 호림현경내의 독정자(秃顶子)밀영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되어 변절하고 후에 위만군 제7군관의 특무가 되었던 정로암은 해방후 변절한 사실을 숨기고 1946년에는 장춘에로 주보중을 찾아가기도 했다. 정로암에게 속아넘어간 주보중은 정로암을 연변 용정에서 꾸리고 있었던 군정대학에 입학시키기도 했으나, 결국 정로암은 변절한 사실이 폭로되어 총살당하고 말았다. 일부 사료들에서는 평양에 볼일 보러 갔던 주보중이 최용건과 만나 정로암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몇해째 감감무소식이던 정로암이가 글쎄 불쑥 나타나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소. 내 그래서 일단 용정군정대학에 보내서 공부를 좀 하라고 했소.”라고 말했더니 최용건이 펄쩍 뛰다시피 했다고 한다. 최용건은 주보중의 낯색이 난감해질 지경으로 “당신은 내 친구 서봉산이하고 부관장 필옥민이 모두 정로암의 손에 죽은 사실을 잊었단말이오.”하고 소리쳤고. “이번에 중국에 돌아가면 만사 제쳐두고 이자부터 잡아내서 들보에 달아매고 족쳐보오. 반드시 불게요. 이 자는 변절했던게 틀림없소.”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가, 주보중은 최용건이 부탁하는대로,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변에 들려 용정군정학교에서 공부중이던 정로암부터 체포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정로암은 1939년 10월, 일본군 토벌대에게 체포된뒤, 항일연군의 간부 명단과 지방의 조직명단을 모조리 불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결국 정로암은 1949년 12월13일, 길림성인민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총살당하였다. 공요하현위당사연구실(中共饶河县委党史研究室)의 자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民国三十五年得知前东北抗日联军第二路军总指挥周保中就任吉林省,乃投靠之,周委以局处职。同年,周赴朝鲜晤崔镛健(石泉)时,崔告之以郑已被俘叛变,且“枉杀徐凤山”等,宜除之。周归乃辑捕之,旋即枪决,年41岁。民国三十六年(1947)事也“



  나가며

  
  광복 70주년(중국에서는 항일전쟁 70주녀)을 맞으며, 중국에서는 한창 항일전쟁을 소재로 하는 “신극”(神劇)가 난무하고 있다. 새롭다는 “신”(新)자가 아니라 신화와 같다는 “신”(神)자를 사용하여 신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공당이 영도하였던 팔로군 신사군은 날아다니는 영웅처럼 만들고, 일본군은 전투때마다 무더기로 쓰러져 죽는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빗대어 항전신극(抗戰神劇고)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작가 예술인들이 항전신극을 만들 때 팔로군과 신사군을 등장시켜도 함부로 항일연군을 등장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항일연군이 얼마나 힘들고도 어려운 역경하에서 일본군과 싸워오다가 종당에는 모조리 패하고 소련경내로까지 피신하여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더도말고 항일연군을 창건하는데 직접 참가했고, 종당에는 7군의 군장과 제2로군의 총참모장에까지 올랐더 최용건의 모습과 만나면서, 이들이 직접 현장에서 만들어냈던 신화란 얼마나 참혹하고도 처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가운데서도 얼마나 인간미가 넘쳤던가를 실감하게 된다. 어데서나 정당이 존재하는 곳에는 명쟁과 암투가 있고, 어데서나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도 반드시 함께 불거져나오군 했다. 공산당도, 국민당보다 서로 별로 낳은 데가 없이 권력을 다투고, 파쟁을 일으키고, 의심하고, 죽이고, 물어뜯고, 헐뜯고 하는데서는 피장파장이었다.
  중국에는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속담이 있다. 한 장수의 성공은 만 군사의 해골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용건의 경우도 바로 이와 흡사한데가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의 몫까지도 살아남은 자가 모두 독차지하였던 사례를 우리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가 있는데, 이런 사례가 최용건에게서도 발생하고 말았다.

                        
[사진설명]

경락정의 아내 왕옥길이 보관하고 있은 일본군 소좌 히노 다케오의 군도와 망원경


   경락정과 왕옥길 사이에서 태어났던 경국청이 부모가 남겨놓은 유물을 세상에 공개하였는데, 그것은 1938년 8월16일, 경락정이 일본군 소좌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일행 39명을 사살하고 노획한 일본군 좌관지휘도 한자루와 망원경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든 항일투쟁사 연구학자들은 히노 다케오를 소좌가 아닌 소장으로, 항일연군의 역사에서 제일 군사직함이 높은 일본군 장군을 최용건이 사살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것이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또 만주국경수비대에서 무원국경경찰본대 및 삼강성 경무청장(抚远国境警察本队长及三江省警务厅长) 앞으로 발송하였던 비밀전보문도 발굴되었는데, 이 전보문에서도 “히노 다케오소좌 일행 39명이 항일연군 제7군 경락정의 비적(景乐亭匪)의 습격을 받아 전몰했다”고 흑자백자로 밝히고 있다. 중국말로 번역된 전보 원문은 이러하다.

  “康德 六年八月二十二, 日满洲国境守备队密发第二十六号, 抚远国境警察本队长及三江省警务厅长:日本兵船新京丸,于1938年8月16日上午七时四十五分遭抗联七军景乐亭匪袭击了日本关东军日野武雄少佐的视察船队,日野武雄少佐及随行日军共计39人阵亡”

  이는 경락정이 총살당하고나서 그의 전투공적이 최용건의 전과로 둔갑되었고, 또 사살당한 일본군 소좌도 소장으로 과장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용건의 치부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전투 말고라도 최용건은 만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수도 없이 많이 지휘했었고, 또 많은 전과를 올렸던 것만은 의심할바 없는 사실이다. 그의 군사재능은 7군과 나아가 전체 제2로군에서도 아무도 따를수 없었다. 1945년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직접 북한군을 창건하고 총사령관까지 되었던 것도 다 이와같은 자력(資歷)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최용건이나 또는 김일성을 따라 북한으로 돌아갔던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이 모두 높은 직위에 올라 호강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것만은 아니다. 북한으로 돌아가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 등과 파벌을 이루고 그들을 모조리 處置하는데 성공하였던 항일연군파 안에서도 또 계파갈등이 존재했다. 김일성의 부하로 따라다녔던 박덕산(김일)이나 임춘추같은 사람들은 모두 북한의 당 정치국 위원에 국가 부주석에도 오르는 등 영광을 누렸으나 최용건의 부하로 따라다녔던 김광협이나 최용진, 강신태, 이영호 같은 사람들은 모두 군 부대의 장령에서 멈춰서야 했다. 적지않게는 숙청당하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여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북한으로 함께 돌아가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가 나중에 귀국하였던 장동식의 운명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함경도가 고향이었던 장동식은 함경도로 추방되어 광산노동자로 일하다가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 최용건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못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최고권력을 누렸던 최용건은 1976년에 사망했다.
  




[작가 약력]

유순호 (劉順浩, liu shunhao) 전기문학 작가, 소설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중국 연변에서 출생,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도문시에서 제1소학교와 제1중학교(초중), 제5중학교(고중, 최후 학력) 졸업,
1985년부터 1998년까지 13년동안 역사공부 專念, 중국 동북 3성 徒步답사.
1998년 논픽션 「동북항일연군의 명장 조상지 비사/비운의 장군」 출판(연변인민출판사) 출간,
1998년 중국연변작가협회 가입.
1999년 흑룡강성 상지시 (조상지의 이름으로 명명된 도시) 인민정부로부터 명예시민 칭호와 함께 감사장 수여받음.
1998년 1월부터 장편역사소설 「성중애마」 (1. 2부)가 중국연변작가협회기관지 「연변문학」에서 연재시작,
1998년 11월부터 장편역사소설 「부나비」 (1. 2부)가 중국연변작가협회 기관지 「연변문학」에서 「성중애마」와 함께 竝行하여 연재시작.
2000년 3월 중국연변텔리비방송국에서 논픽션 「비운의 장군」 창작과정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 / 「젊음을 자랑하라」.
2001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가입.
2002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연변지역위원회 준비위원회 발족/상임위원 담임.
2002년 중국조선족의 첫 인터넷 문학 싸이트 「중국조선족사이버문화대광장' 만듬.
동년 중국의 첫 인터넷문학가협회 발족/증국연변조선족사이버문학가협회 창립, 법인대표 및 비서장 담임하였으나 당지 정부로부터 사회주의 문화시장을 교란한다는 죄목으로 取締, 및 강제해산됨.
2002년 중국연변작가협회 자원 탈퇴. 2002년 8월 渡美.
2003년 신앙생활 시작(기독교). 2003년 10월, 맨하탄 소명장로교회에서 세레받음.
미 동부지구 언론사에서 9년간 기자, 정치평론가, 전문 언론인으로 재직.
2006년 뉴욕조선족통신사 창립, 대표 담임/nykca.com
2003년부터 2014년까지 1327편의 신문기사, 칼럼, 수필, 소설 발표.
2008년 논픽션 「만주항일파르티잔/잊혀진 독립운동가 허형식」 출판 (도서출판 선인).
2009년  「유순호 문학선집」 전3권(도서출판 선인) 출판.
작가이메일: liushunhao@hanmail.net)


작가 사진



  
작가 연락전화, 이메일, 홈페이지

위쳇: liushunhao-nykca
이메일:liushunhao@hanmail.net
홈페이지: www.nykca.com


한마디만   - 2015/06/18 05:13:43  
이 책 소장하고 싶음.
허수옥   - 2015/06/18 05:16:46  
류순호선생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독고 민수   - 2015/06/18 22:29:34  
인터넷으로 주문했습니다. 도착하는대로 열심히 읽겠습니다.
오해연   - 2015/06/19 04:16:47  
작가님 축하드려요~
북경조선족   - 2015/06/20 02:32:40  
아 정말 대단한 역사자료입니다!!!1
조명철   - 2015/06/21 10:16:06  
그동안 중국조선족항일렬사들의 인물략전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한 인물에 대하여 자세하게 연구를 진행하고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자료는 처음 읽습니다.
최용건 너무 멋지신 우리 민족의 혁명가이며 인간적으로 너무 진솔하고 생생하게
잘 소개하였다고 봅니다.
이 책 반드시 소장하고 싶은 책입니다.
연변독자   - 2015/06/22 22:58:26  
이처럼 좋은 책을 국에서만 발행되고 중국 연변에서는 사서 읽을수 없는것이 유감스럽습니다.
김금하   - 2015/06/27 23:21:40  
작가님 축하합니다~
알렉스   - 2015/07/01 01:42:33  
이 책 한권 보고싶은데 살수는 없을가요?
독고 민수   - 2015/07/07 00:10:17  
유선생님의 책을 오늘 받았습니다.
아직 읽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독서 들어갑니다. 서문만 먼저 읽었는데
가슴에 뭉클하고 안겨오는 느낌 때문에 먼저 여기다 몇자 적습니다.
또 오겠습니다.
재한 조선족   - 2015/08/07 01:14:23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09665
책소개를 하나 할까합니다. 잘릴지도 모르겠네요. 저랑 작가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저역시 보자마자 주문한 독자일 뿐입니다.

이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만주독립운동사에서 최용건편을 독립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제가 최용건 연재를 마치 영웅전기 비슷한게 30년대초까지 쓴적 있는데
<만주 항일 속으로> 는 30년대 최용건을 스캔들 위주로 다루었습니다.


책을 쓴 유순호 작가는 남한도 북한도 중국도 아닌 <재미 조선족> 작가입니다.
이분 쓴글 여러개 읽어봤는데 조갑제와 강준만을 절반으로 갈라놓은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조선족 평단에서 반기를 들고 많은 필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조선족 역사소설가랄까요?


만주 항일 속으로는 최용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다룬 책이 아닐까 합니다.


책이 객관적인 것은 유순호 작가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북한편은 일단 아닙니다.
남한편도 아닙니다.
중국편도 아닙니다. 탈북자처럼 탈중자라 할수 있습니다.
중국비판을 많이해서 미국시민권도 망명으로 받지 않았나 싶을 정도
조선족은 조선족인데 제3의 조선족이라고 할까요.


최용건에 대해 이정도까지 탐사취재한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드네요.

사실 최용건 역사는 남북중 3국 역사가가 합작으로 써야 합니다.

20년대는 남한역사가가 30년대는 중국(조선족)역사가가 45년후부터는 북한역사가가 써야죠.

30년대를 조선족 역사가가 운을 띄었으니 20년대와 광복후 역사도 씌여지길 기대합니다.


최용건 (崔鏞建 1900-1976)
- ‘진짜배기 독립운동가’가 공산주의자로 둔갑하기까지
재한 조선족   - 2015/08/07 01:38:36  
리광인:

어제 밤 유순호씨가 올린 댓글을 보았다. 우선 유순호씨의 문제제기에 감사를 드린다. 내가 주의를돌리지 못하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 남에게 전가하려는것이 아니라, 2005년 10월 한국학술정보(주)에서 출판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4권) 겉면과 뒤면에 오른 이른바 “항일련군”의 사진은 저자인 나의 제공이 아니라 한국학술정보 측의 소행이다. 그러나 10년을 웃도는 오늘날까지도 나는 이 사진에 주의를 돌리지 않았고 사진등장 인물들이 악명이 자자한 일본침략군들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나도 우리 력사와 씨름해온 사람으로서 이땅의 항일관련 모든 사진자료를 수집해 두는 습관이 있다. 유순호씨의 댓글을 보고 급기야 항일련군 관련 력사사진을 점검하니 제기된 사진설명에는 “돈화현 우심정자일대의 항련 제2로군 일부”라고 되여 있었다.
이에 따라 중문 바이두(百度)를 검색하니 이 사진이 일본침략군의 사진이라는 글들이 많이 올라 있었다. 그 가운데서 白山출판사에서 출판한 “동북항련 정신” 등 여러 책들에서 모두 이 사진을겉면에 올렸거나 항일련군 사진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그때에야보니 중문 많은 신문이나 인터넷, 책들에서 이 사진을 항일련군 사진으로 알고 쓰고있었다.
또, 아직 깊이있게 찾아보지는 못했으나 조선이나 한국도 이 한장의 력사사진을 항일련군 사진으로알고있었다.
례켠대,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에서도 이 사진을 “미혼진밀영에 있는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이라 했고, 한국 학술정보에도 항일련군 사진으로 알고 저자의 전4권 책에 이 사진을 올리였었다.
이는 중국이나, 조선, 한국 모두가 이 사진을 항일련군의 사진으로 알고있었음을 말하여준다. 이 사진관련 아직 연구는 없으나 중문 바이두를 보니 王锦思씨가 소장했다는 日军影集ㅡ《吉林、通化、间岛三省治安肃正工作纪念写真—野副讨伐队》에 이 문제의 사진이 들어있다고한다. 사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사진속이 일본침략군들임은 긍정적일것 같다. 하지만 일찍 결론을 내리지 말고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할것 같다.
문제는 이 사진이 어떻게 항일련군의 사진으로 둔갑했는지, 어느 때부터였는지 나는 아직 모르고있다. 바이두에 오른 중문 글들로 보면 이 사진이 항일련군이 아닌 일본침략군이라고 인테넷을 장식한것은 2012년 초 이후로 보인다. 2012년 초 이전 글들에서는 이 사진을 계속 그대로 항일련군 사진으로 쓰고있었다.
한마디 더 부언한다면 중문 사진설명에 “돈화현 우심정자일대의 항련 제2로군 일부”로 되여있는데 항련 제2로군이라는 지적도 틀리는 지적이다. 항련 제2로군은 북만에서 활동한 항일련군 제제4군, 5군, 7군. 8군, 10군으로 조직되였고, 돈화현 쪽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사진의 그 세월 돈화 우심정자에서 활동한 항일련군 부대는 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진한장 부대, 즉 원래의 항일련군 제2군 제5사 부대이다.
어찌하든 이 사진은 1939년 돈화현 우심정자에서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한 우심정자 사건과 관련되는것 같다. 우심정자전투후 진한장은 전투의 승리를 경축하고저 돈화 “일신사진관” (日新写真馆)에서 郎殿甲과 둘이서 일본군 협화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까지 하였다.이 사진은 지금 진한장의 소중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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