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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김일성 평전
피안   Hit : 1907 , Vote : 39        [2017/04/09]









많이 얻어들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소개하며 김성주의 손을 잡은 조아범은 연신 그의 손을 흔들어댔다. 채수항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김성주도 너무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채수항이라구요? 그 형님은 내가 길림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친했던 사이입니다.”
“네, 채수항 동지가 길림에서 사범학교에 다닐 때 당신과 만나 장차 나라를 찾는 큰일을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사이라고 합디다. 알고 지냅시다. 조아범은 제 본명이고 별명은 ‘청산준걸’(靑山俊傑)입니다.”
“청산준걸이라, 별명이 정말 멋진데요.”
“그래도 ‘김일성’만큼만 하겠습니까.”
조아범은 벌써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본 듯 했다.
“그러잖아도 채 형의 소식도 궁금하고 정말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소식도 알게 되는군요. 빨리 채 형의 소식부터 좀 알려주십시오.”
마침 중국 공산당과의 조직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진한장에게도 부탁하고 또 그 자신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과거의 친구들과 만나려고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던 김성주는 조아범과 만난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진한장이 곁에서 조아범의 손을 잡고 연신 흔들어대는 김성주를 나무랐다.
“아이고 급하기는, 천하의 김일성이 왜 어린아이들처럼 이러나?”
진한장이 김성주를 ‘김일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조아범도 갑자기 생각나듯이 말했다.
“참, 내가 사실은 채수항 동지뿐만 아니라, 왕청에서 이광 동지도 만났댔습니다. 그분들에게서 성주 동무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김일성이란 이 별명이 참 멋지십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한별 동지의 별명을 흉내 내서 제가 제 별명으로 만들어 본 것뿐입니다.”
조아범은 갑자기 진한장을 돌아보며 김성주에게 말했다.
“참, 한장 동무한테도 내가 아직 알려주지 않았지요? 우리 동만주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지금 와 있는 것을 아십니까? 아마도 조만간에 만나게 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11년생으로 어렸을 때 북경의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에서 공부하며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한 조아범은 1927년 ‘4ㆍ12 청당사건’ 직후 바로 중공당 조직에서 향산자유원의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을 동북으로 파견할 때 여기에 선발되어 오늘의 용정시 개산툰진(開山屯鎭) 천평(泉坪)에 와서 소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당시 개산툰진은 화룡현에 소속되어 있었고 중공당 화룡현위원회 초대 당서기가 바로 채수항이었다.
조아범은 중국인이었지만 화룡현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 조선말을 배웠는데 그가 조선말을 할 때면 아무도 그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내지 못할 정도였다. 1930년 ‘5·30폭동’을 겪으면서 중국 공산당 내의 조선인 당원들과 깊은 우정을 쌓은 그는 조선인 당원들의 칭찬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특위 군위서기 양림(楊林)1이 유격대를 조직하는 일로 왕청과 화룡지방을 뛰어다니고 있을 때 조아범은 동만특위의 결정에 의해 양림의 경호원을 맡았다. 이때 조아범은 양림을 따라 동만주의 방방곡곡 가보지 않았던 곳이 없었다.
“아니, 진짜 김일성 장군이라니요?”
김성주도 진한장도 모두 놀라며 조아범을 바라보았다. 조아범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그분의 신분은 당의 비밀이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위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되면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조아범은 김성주에게 빨리 채수항과 만날 것을 권고하였고 또 그 자신이 김성주를 찾아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광 동지로부터 성주 동무의 가족들이 모두 안도로 이사하여 와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채수항 동지께 이 소식을 전해주었댔습니다. 안도 소사하에는 화룡현 이도구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그쪽으로 몸을 피한 당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로 우리 당의 안도지구 위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유격대도 만들려고 하는데 유격대를 조직하는 일을 바로 성주 동무가 맡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채수항 동지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마 채수항 동지께서 이 일을 특위에도 회보하였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성주 동무와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성주는 유격대를 조직하는 일을 맡아달라는 소리에 벌떡 뛰어 일어났다.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바로 당장 떠납시다. 유격대를 조직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입니다. 얼마든지 조직할 수 있습니다. 저희한테는 지금 총도 있고 또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매불망 당 조직과의 조직관계를 회복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김성주는 조아범과 며칠 뒤에 다시 화룡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다음날 아침 먼저 진한장과 함께 할바령(哈爾巴嶺) 쪽으로 떠났다. 김성주도 그날로 돈화를 떠나 안도로 갔다. 옹성라자 근처에서 차광수와 만났는데 그는 고유수에서부터 데리고 왔던 대원들이 절반이나 또 줄어들어 1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김성주도 당황하여 “사람을 자꾸 잃어버리면 나중에 무슨 수로 혁명군을 다시 만듭니까?” 하고 짜증을 내니 차광수는 또 차광수 나름대로 화를 내면서 고충을 하소연하였다.
“너야말로 어디 가서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서는 한다는 소리가 이거냐? 돈이 떨어져 밥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니, 아이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사라져버리는데 난들 무슨 수가 있단 말이냐? 난 너를 따라 동만으로 나오면서 중국 공산당과도 관계가 맺어지면 댓바람에 큰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감나무 밑에서 절로 떨어지는 감을 얻어먹으려고 했던 것 같아 후회된다. 그러잖아도 작년에 근혁이가 하얼빈으로 가면서 나한테 지금은 대원들이 적지만 ‘누리에 붙는 불’을 생각하라고 하더라. 작은 불꽃도 큰 불길로 키워서 세상을 태우는 불길이 되라는 뜻이다. 난 지금 데리고 있는 대원들로 세화군(世火軍)이라는 군대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어떠냐? 반대의견이 없겠지?”
김성주는 진한장에게서 여비에 보태 쓰라고 받았던 돈 10원을 꺼내어 차광수의 손에 쥐어주면서 달랬다.
“형님, 급하시기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군대 이름은 형님이 마음대로 알아서 아무렇게나 지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어떤 일로도 더 이상 동무들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세화군이라는 이름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근혁 형님이 ‘누리에 붙는 불’이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저도 찬성입니다.”
남만청총 때 차광수의 소개로 김근혁과 만나 친하게 지냈던 김성주는 붙임성이 좋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차광수에게는 허물없이 형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내성적이고 항상 말수가 적은 김근혁과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먼저 나갔다. 그럴 때 마다 김근혁은 김성주의 손을 잡아당기며 정답게 권하곤 했다.
“성주야, 광수한테는 허물없이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나한테만은 이래?”
이종락의 파견을 받고 하얼빈으로 갈 때 김근혁은 이미 장가를 들었고 아내가 방금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래서 김근혁은 아내와 어린 아들 김환(金渙)을 유하에 두고 혼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도리(道里)의 한 층집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자살하려고 3층집에서 뛰어내렸으나 죽지 않고 다리만 부러져 산 채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후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는데 김성주는 항상 김근혁을 그리워하였다. 후에 평양으로 돌아가 북한정권을 세운 뒤 김성주는 김환을 찾아내어 만경대학원에서 공부시켰고 동독(東獨)에도 유학을 보냈는데 김환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김성주의 항일연군 시절의 전우인 김일(朴德山)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던 김환은 1972년에 노동당 중앙위원을 거쳐 1983년에는 정무원 부총리까지 되었다. 북한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근혁을 김혁(金赫)으로 부르고 있다.


2. “아, 혁명은 가까워온다”


채수항과 만나러 가는 길에 김성주는 다시 안도에 들렸다. 앓고 있는 어머니의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삼촌 김형권이 최효일, 박차석과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가 체포되어 현재 경성부 감옥에 수감 중이라는 소식이 안도에도 들어왔을 것을 생각하니 숙모가 되는 채연옥과 어린 사촌 여동생 영실이는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여간 걱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주는 회고록에서 “그 당시 우리와 같이 혁명을 한 청년들 속에서는 싸움의 길에 나선 남아 대장부라면 마땅히 가정쯤은 잊어야 한다는 심리가 상당한 정도로 유행하고 있었다. 가정을 생각하는 사람은 대사를 치르지 못한다는 것이 청년 혁명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김성주는 유달리 다정다감하였고 눈물도 많았던 젊은 혁명가였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때까지 김성주의 할머니 이보익이 처음에는 큰아들을 잃고 과부가 된 큰 며느리 강반석이 걱정되어 만주로 나왔다가 이번에는 또 둘째 아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생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 채연옥이 걱정되어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안도에서 두 며느리를 돌봐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조광준의 후실로 들어갔던 강반석도 이때 다시 조광준과 헤어지고 시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왔다.
1931년 여름, 최정숙(崔貞淑)이라고 부르는 한 여성 중공당원이 소사하에 나타나 강반석을 찾아왔다. 그는 소사하에서 부녀회를 조직하면서 여기에 강반석을 참가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처음에 강반석이 말을 듣지 않자 최정숙은 공청조직을 움직였는데 여기에 강반석의 둘째 아들 김철주가 가입하게 되면서 강반석의 마음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김철주는 어머니가 처녀시절부터 몸에 가지고 다녔다는 지금은 너무 낡아서 보풀이 일고 책장마다 너덜너덜해진 성경책을 몰래 훔쳐내어 숨겨놓고는 어머니에게 부녀회에 나가지 않으면 성경책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졸라댔다.
“하나님밖에 모르는 우리 어머니를 철주 네가 혁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구나.”
김성주는 어머니에게서 동생 철주가 어느덧 공청원이 되어 활동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김성주가 소사하에 도착한 다음날 김철주가 형을 데리고 대사하로 갔다. 돈화에서 조아범과 만났을 때 조아범에게서 소개받았던 김일룡(金一龍)이라는 사람이 대사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도 김철주도 모두 김일룡을 알고 있는 것이 여간 희한하지 않았다.
“그분이 대사하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부녀회에도 자주 오시고 또 철주네 공청에도 자주 가서 마르크스도 강의하고 또 노래도 가르쳐 주시곤 한단다.”
김성주는 찬송밖에 부를 줄 모르던 어머니가 부녀회에 다니면서 많이 변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럼 어머니도 배운 노래 몇 곡 있습니까?”
“남들이랑 같이 부를 때는 함께 따라 부르는데 혼자서는 노래를 못 시작하겠구나.”
강반석의 대답에 김성주는 동생에게 시켰다.
“철주야, 네가 시작 좀 해보려무나. 평생 찬송밖에 부를 줄 모르는 우리 어머니가 혁명노래 부르는 것을 한번 듣고 싶구나.”
그러자 김철주는 좋아라 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아, 혁명은 가까워온다.
오늘 내일 시기는 박도한다.(각주: 임박한다)
일어나라 만국의 노동자야
깨달어라 소작인들 각성하라.


다음날 김성주는 동생과 함께 김일룡을 만나러 대사하로 가면서 계속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노래는 ‘간도혁명가’인데 전번 야학 때 배웠는데 두 번째 절을 기억 못 하겠어.”
김철주는 형을 돌아보며 물었다.
“형두 이 노래 알아?”
김성주는 혁명가요라는 혁명가요는 거의 통달하다시피 했다.
“철주야, 형도 혁명가요 많이 알지만 형의 친구들 가운데는 전문적으로 혁명가요를 만드시는 분도 계신단다.”
이렇게 말할 때 김성주는 김근혁과 차광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철주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 노래 ‘간도혁명가’의 두 번째 절과 세 번째 절도 한 번에 쭉 불렀다.


놈들이 쓰고 사는 벽돌집도
놈들이 먹고 입는 금의옥식도
비행기, 연극장, 전차, 상품도
모두 다 우리들의 피와 땀일세.
소작인이 일 년 동안 잠도 못 자고
못 먹고 못 입어 병에 걸려


김철주는 형이 부르는 노래에 반했다.
“형은 정말 대단해. 형은 또 어떤 노래도 부를 줄 알아? 형은 우리 ‘공청가’도 부를 줄 알아? 난 ‘공청가’는 두 번째 절까지 모조리 부를 수 있어.”
“공청원이 공청가를 모르면 어떻게 한다니?”
“형 난 이 노래가 제일 좋아.”
“형두 제일 좋아하는 노래란다. 그럼 우리 한번 같이 불러보자꾸나.”


새 사상 동터온다 모두 다 마중 가자.
오너라 무산청년 네가 갈 길이다.
용감하게 낡은 사회를 무찔러라 불질러라.
너는 무산청년이니 무산청년답게
이마에 땀 흘리고 손에 못 박힌다.
호미나 곡괭이나 있는 대로 둘러메고
나서라 외쳐라 가라 혁명의 전선으로
너는 무산청년이니 무산청년답게


두 형제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대사하 기슭에서 쩡쩡 울려 퍼졌다. 밭에서 김매고 있던 농군들이 김철주를 보고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철주야, 이 총각은 누구냐?”
“저의 형 성주예요.”
김철주는 오래만에 형과 함께 지내며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자기의 형을 자랑하였다.
“혹시 그럼 김일성이라고 부른다는 그 혁명군 총각인가?”
간혹 가다가 이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니, 어떻게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여기까지도 퍼져왔지?
김성주는 반신반의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안도에서도 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이제 김일룡 아저씨 만나게 되면 형두 놀랄 거야. 형이 감옥살이도 하고 또 경찰에게 잡혔던 신문기사랑 다 읽었던 것 같아. 형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랑 외삼촌하고 삼촌의 일이랑 다 환하게 알고 있어. 전번 공청회의 때는 김일룡 아저씨가 와서 형을 칭찬하는 말씀을 많이 했는데 형이 열네 살 때 벌써 왜놈과 싸우기 위하여 군사학교에 들어가서 군사도 배웠다는 이야기도 해줬어.”
동생의 말을 들으며 김성주는 점점 호기심이 동했고 빨리 김일룡과 만나기 위하여 부지런히 걸음을 다그쳤다.


3. 김일룡과 대사하


대사하에 도착하였을 때 김일룡이 먼저 김철주를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김성주는 깜짝 놀랐다. 철주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가 3~40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50도 더 되는 노인네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어떻게 불렀으면 좋을지 몰라 주저하다가 그냥 철주가 아저씨라고 부르니, 따라서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랬더니 오히려 김일룡 쪽에서 먼저 새파랗게 젊은 김성주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청하면서 “성주 동무, 이렇게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소.” 하고 반기니 김성주는 황망히 다시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김성주가 아저씨에서 선생님으로 바꿔 부르니 김일룡은 황망히 시정했다.
“그냥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면 편할 것 같소. 공부를 많이 한 성주 동무가 더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 아니겠소.”
“아닙니다, 난 그냥 평범한 중학생일 따름입니다.”
김성주가 아무리 겸손하게 나와도 김일룡은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오. 난 그럼 성주 동무를 성주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소. 그리고 내가 이래 뵈도 아직은 40 전이오. 형님이라고 부르기에는 내 나이가 많지만 아직 노인네 취급을 받을 나이까지는 아니잖소. 내가 얼마나 성주 동무와 만나고 싶어 했는지 아오?”
김일룡은 김성주의 손을 잡고 길가의 밭두렁에 가서 앉았다. 이 밭은 김일룡이 소작 맡아 짓고 있는 대전자의 지주 장홍천의 땅이었다.
“길림성 정부에서는 올 봄에 벌써 ‘37’, ‘46’ 감조법령을 반포했는데도 간도의 지주들은 누구도 이 법령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고 있소. 내가 안도로 이사나 온지도 벌써 올해까지 햇수로 4년째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일 같은 일을 해본 적이 없다가 이번에야 당에서는 ‘감조감식’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면서 안도에서 ‘추수투쟁’을 진행할 것을 나한테 지시해왔소. 그동안 공청도 발전시키고 또 ‘부녀회’, ‘반일회’ ‘반제동맹’ 같은 단체들도 조직 중에 있지만 문제는 이 지주들이 집에 가병을 키우고 또 가병들이 총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제일 큰 골칫거리요.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때에 화룡에 갔던 연락원으로부터 군사학교에도 다녔던 적이 있는 성주 동무가 안도에 올 것이라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오.”
김성주는 지주 장홍천의 집에 총까지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했다.
“아니, 아저씨. 장 지주의 집에 총까지도 있단 말입니까?”
“장총 두 자루 외에도 또 마름이 궁둥이에 달고 다니는 목갑총까지도 한 자루 있다오.”
김일룡의 말에 김성주는 벌써부터 너무 좋아 안절부절 못 했다. 목갑총이라면 일반 권총이 아니고 일명 ‘샤창’(匣枪)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마우저 권총, 즉 모젤 권총을 말한다. 김성주가 오랫동안 욕심내왔던 권총이기도 했다.
모젤 권총은 1896년에 처음 독일의 총기제작자 마우저 사에서 제작됐다. 보충 탄창을 장치하면 최대 40발까지도 쏠 수 있고 사격 거리도 2백 미터에 달해 평소 만주의 마적들뿐만 아니라 동북군의 군인들, 그리고 독립군들까지도 모두 선호하는 권총이었다. 그러나 나무 값이라는 뜻의 ‘싸창’이라는 별명이 붙을 지경으로 복제품이 많이 생겨났고 그러한 복제품 ‘싸창’에 대해서는 중국 사람들이 또 모즐(毛櫛)권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성주는 김일룡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우리도 유격대를 만들고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장 지주에게 총까지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그것을 빼앗아서 우리가 무장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 일은 제가 맡을 것이고 제가 안도에서 이번 추수투쟁을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니 아저씨는 아무 걱정도 마십시오.”
김성주가 이렇게 나오니 김일룡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일룡은 너무 좋아 온 얼굴에 웃음이 어린 모습으로 말했다.
“큰 걱정거리가 풀린 셈이요. 난 성주 동무가 지금 ‘김일성’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소. 천하의 ‘김일성’이 왔는데 무슨 일인들 풀리지 않겠소.”
“아니, 아저씨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까?”
김성주가 놀라니 김일룡은 그때에야 자기의 소개를 했다.
“성주 동무는 내 어디서 태어난 사람인지 모르지? 내 고향이 바로 함경남도 단천이오. 단천은 ‘김일성’의 이름이 처음 태어났던 고장이기도 하오. 단천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던 의병장 김창희 대장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나는 열여네 살 때부터 김창희 대장을 따라다녔댔소. 그때 김창희 대장의 나이도 아직 20세 이전이었소. 내 기억 속의 김창희 대장은 역시 성주 동무처럼 키도 컸고 미남이었으며 특히 말을 잘 타고 다녔소. 나는 의병에서 제일 나이 어린 병사였기 때문에 겨우 어른들의 심부름이나 다닐 정도였는데 어느 날 심부름 갔다가 숙영지로 돌아오니 일본군의 토벌대가 와서 모조리 휩쓸고 가버린 뒤였소. 김창희 대장과도 더는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분이 계속 마천령 어디에 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소.”
김일룡은 김창희의 의병부대를 따라다닐 때 나이 어렸고 그 때문에 겨우 심부름이나 다닐 정도였다고 자기를 소개하였지만 단천에서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사실 그를 잡기 위하여 현상금까지 내걸었었다.


4. 반일적위대 대장


항일연군 생존자들 가운데는 김일룡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60살도 더 되는 늙은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1940년이면 김일룡의 나이가 겨우 46살밖에 안 된 때인데 그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원들은 모두 그를 ‘부관 아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일룡은 그해 봄에 항일연군 제1로군 3방면의 군수부 부관으로 일하다가 한 부대안의 ‘되님’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 변절자가 부대를 이탈하고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고 설득하다가 그만 그자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김일룡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또 1931년 춘황, 추수투쟁에도 모두 참가하였던 한 생존자가 1983년 화룡현 항일투사좌담회에서 그때의 일화 하나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때 대사하에 왔던 김일성(김성주)이 김일룡과 함께 ‘반일적위대’를 만들고 대장이 되었는데 김일룡은 사무장이 되었다. 적위대의 무기라고는 김일성한테만 권총 한 자루가 있었을 뿐인데 탄알은 한 방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 빈 권총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거의 터지지도 않는 화승총 몇 자루와 칼, 창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장홍천의 집을 습격하는 날에 장혼천을 죽여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일로 몇 시간이나 쟁론했는데 누가 나서서 장홍천이가 가병들을 동원하여 혁명자를 체포하여 명월구에 압송하여다가 ‘상’을 타먹었던 적도 있었다고 적발하였다. 김일성은 ‘그 혁명자가 우리 조선 사람인가?’고 묻고 ‘중국인이다.’고 대답하니, ‘그럼 그냥 총만 빼앗고 인명은 해치지 맙시다.’고 건의하더라. 그날 밤에 적위대가 장홍천의 집을 포위하였는데 장홍천의 집에서 일하는 머슴 하나가 돈 1원을 받기로 하고 적위대를 도와 몰래 문을 열어주었다. 김일룡이 앞장에서 장홍천이 자고 있던 방에 들어가 흔들어 깨우고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지금 그분이 왔다’고 하면서 김일성을 앞에 소개하니 장홍천은 무슨 큰 강도나 만난 것처럼 어찌나 놀라는지 땅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면서 바로 일어서지도 못하더라. 김일성이 유창한 중국말로 ‘장 나으리, 겁낼 것 없습니다. 항일구국사업에 누구나 한몫씩은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집에 있는 총들을 우리 적위대에 헌납해야겠습니다.’고 말하니 장홍천은 부리나케 허락하더라.”
이때 장홍천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던 것이 훗날 큰 악재로 번졌다. 장홍천은 명월구 경찰대대로 달려가 “우리 집 소작농이 ‘김일성’이라고 부르는 젊은 강도를 데리고 와서 곡간을 모조리 털어갔고 또 총도 네 자루나 빼앗아갔다.”고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은 김일룡을 붙잡기 위하여 먼저 김일룡의 아내부터 붙잡았다. 김일룡의 아내가 며칠 건너 한 번씩 명월구에 나와서 검정귀버섯을 팔았는데 그렇게 돈을 벌어가지고 오면 김일룡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모조리 그 돈을 빼앗아내곤 하였다. 이러는 탓에 김일룡의 아내가 돈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여기저기다가 숨겨놓으면서 악을 쓰고 울고불고 싸우기도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경찰대대에서는 김일룡의 아내를 인질로 잡아놓고 김일룡을 불렀으나 김일룡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생각던 끝에 경찰대대에서는 김일룡의 아내를 데리고 직접 대사하로 내려갔다. 그러나 소사하까지 왔을 때 김성주가 박훈(朴訓)이라고 부르는 괴한 하나를 데리고 김일룡의 아내를 데리고 대사하로 오고 있었던 경찰들을 습격했다. 김일룡의 아내를 압송하여 오던 경찰 셋 가운데 둘이 박훈의 권총에 맞아죽고 돌아서서 내뛰고 있었던 경찰을 김성주가 쏘았으나 경찰이 넘어지기는 커넝 오히려 총소리를 듣고 놀란 김일룡의 아내가 땅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동무, 동무가 사람을 잘못 쏜 것 같소.”
중국 남방에서 나온 박훈은 중국 공산당 연길현위원회 비서 오빈(吴彬)2으로부터 김성주를 소개받고 안도로 올 때 김성주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소개받았던 탓에 만나서부터 계속 ‘김일성’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김성주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김성주는 장홍천에게서 빼앗은 권총이 진짜 독일제 권총이 아니고 복제품이라고 불평했다.
“이 ‘싸창’이 죽어라고 명중이 잘 안됩니다.”
“총신이 문제 있다고 해도 요령을 장악하면 명중이 되는 법인데 뭔 타령인가.”
박훈은 김성주의 권총을 가져다가 손에 들고 몇 번 가늠해보더니, 바로 도망쳐가고 있었던 경찰에게 단방에 명중시켰다.
“그나저나 빨리 저 아주머니한테 가보오.”
박훈은 뛰어가서 경찰들의 총을 걷어왔고 김성주는 김일룡의 아내를 둘러업고 달려왔다.
“박형, 이 아주머니가 총소리를 듣고 기절한 것 같습니다.”
“빨리 피하기오.”
김성주는 박훈과 함께 김일룡의 아내를 둘러업고 소사하로 갔다.
뒤늦게 달려온 김일룡은 자기의 아내가 오랜 지병을 앓아오고 있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더구나 김일룡의 아내는 올해 접어들면서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졸도하여 쓰러졌는데 한 번 쓰러지면 하루나 이틀 동안씩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때 졸도한 김일룡의 아내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였다.


5. 종성으로 가다


김일룡은 아내가 죽고 나서 바로 대사하를 떠나 대푸차이허(大蒲柴河)로 피신했다. 김성주는 박훈을 데리고 왔던 연길현위원회 비서 김춘식(金春植)과 함께 오늘의 용정시 조양천진 구수하로 오빈(吳彬)과 만나러 갔는데 이때 안도에 남은 박훈은 김성주의 소개를 받고 차광수와 만나러 천보산으로 갔다. 김성주의 동생 김철주가 길안내를 섰다. 차광수가 김철주를 알기 때문에 김철주를 데리고 가면 소개장이 따로 필요 없었다.
“광수 형님이 천보산에서 세화군인지 뭔지 하는 군대를 만들겠다고 합디다만 유하에서부터 데리고 나왔던 동무들이 모두 흩어지고 지금 몇 명이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소. 대신 총들은 모두 녹슬지 않게 기름도 바르고 잘 보관해두고 있다고 합디다.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가진 사람이 너무 없어서 광수 형도 나도 정말 속 태웠는데 이번에 박 형이 돕겠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김성주는 기차역까지 배웅하러 나온 박훈과 말을 주고받았다. 박훈은 작년(1930년)부터 동만주 각지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는 유격대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되고 있는 데 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했다.
“김일성 동무 이야기만 나오면 김일성이 자기의 친동생이라고까지 자랑하는 사람이 왕청에 있소. 그게 누군지 김일성 동무도 잘 알지오? 이광이 있는 왕청이 지금 제일 앞장서고 있소. 우리 조선 사람들이 사는 동네들마다 유격대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는 동네가 없소. 나자구, 대흥구, 묘령, 천교령, 하마탕, 목단지, 계관라자, 대북구,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하겠구먼, 어떤 동네들은 대원들이라야 고작 둘, 셋밖에 안 되지만 그들을 다 한데 모아놓으면 한순간에 수십 명씩 모여지오. 문제는 총과 탄알인데 김일성 동무의 여기 조건은 얼마나 좋소. 조선혁명군에서 훔쳐가지고 나온 총이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다니 말이오.”
이처럼 동만주 각지에서 유격대가 신속하게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박훈 같은 황포군관학교 출신 혁명가들이 여기저기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을 모조리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 산하로 집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양림이었다. 김성주가 얼마 전에 돈화에서 만났던 조아범이, 그리고 이번에 김성주를 찾아왔던 박훈이 “지금 만주 땅에 진짜 ‘김일성’이 나타나서 숱한 유격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오.”라고 한 말은 바로 양림에 대하여 하는 말이었다.
김성주는 회고록에서 양림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가까스로 “만주성 당 서기 나(라)등현과 당 군사위원회 서기 양림은 ‘9 ·18 만주사변’후 심양을 떠나 행처를 감추고 있었고 양정우는 아직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어서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일단 양림이 자기와도 같은 조선인이며 당시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군사 분야를 책임지던 최고의 지도자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지만 “그가 행처를 감추고 있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회고담을 내놓은 중국인 항일장령 마덕전(馬德全, 후에 변절)은 해방 후 길림성 돈화현에서 살았는데 1961년에 한창 북·중 갈등이 불거지고 있을 때 제일 처음 “북조선(북한)의 저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이다.”는 말을 했다가 홍위병들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그일이 있은 후 돈화현을 떠나 교하현으로 피신한 마덕전은 1987년까지 살아있으면서 1930년대, 자기가 직접 상관으로 모시고 다녔던 김일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이 아니고 가짜 김일성이라는 것은 항일연군에서 나만 혼자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왕덕태 군장은 김일성의 상관이었고 나는 처음에 김일성과 동급이었지만 후에는 김일성이 나보다 더 높아졌다. 그가 제6사 사단장이 되면서 나는 그의 밑에서 9연대 연대장이 되었는데 나는 1940년 7월에 재수 없게도 나보다 먼저 변절하였던 사단참모장 임수산에게 붙잡혀 하는 수 없이 변절하고 말았다. 난 지금도 임수산에게 붙잡히던 그 장소를 잊지 않고 있다. 안도현 ‘요우퇀’(腰團)이라는 동네인데 그 동네 뒷산에서 붙잡혔다. 내가 주력부대와 떨어져 ‘요우퇀’에서 떠돌아다녔던 것은 완전히 김일성 때문이었다. 그가 6사에서 유일하게 중국인 연대장이었던 나를 아주 많이 박대했다. 물론 그때는 그의 이름이 완전히 김일성으로 바뀐 뒤였다. 그러나 나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뿐만 아니라 군장이었던 왕덕태까지도 알고 있었다. 나와 왕덕태는 모두 재황(灾荒) 때문에 산동에서 동북에 피난 왔던 사람이고 차조구(茶條購)라는 동네서 머슴살이도 함께 했었다. 1930년 ‘추수폭동’ 때 우리 동네에 ‘김일성 장군’이 왔다는 소문이 돌아서 왕덕태가 나를 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후에 유격대에 가입한 뒤에 왕덕태가 나한테 하는 말이 ‘진짜 김일성 장군은 동만 특위 군사위원회 서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람의 생김새도 환하게 기억하고 있다. 키가 아주 큰 사람이었는데 목소리도 엄청 높았으나 눈은 크지 않고 ‘빼대대’했다. 우리 2군 부대가 남만으로 이동할 때 난 왕덕태와 한동안 같이 행군하면서 ‘가짜 김일성이 이제는 진짜 김일성이 돼버렸다.’고 말했더니 왕덕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나? ‘진짜고 가짜고 따로 있나. 진짜 김일성도 김일성이고 가짜 김일성도 김일성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짜 김일성은 그럼 김일성이 아니란 말이냐.’며 버럭 역증을 내더라. ‘진짜 김일성이 다 사라져버렸으니, 그럼 가짜 김일성이라도 김일성 노릇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마덕전은 중국말 절반, 조선말 절반 섞어가면서 말했다. 마덕전의 조선말은 항일연군에서 배운 것이었고 그가 거느리고 다녔던 항일연군에는 대부분 함경도 출신과 간도태생의 대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눈이 작다는 표현을 ‘빼대대’(뱁새눈이라는 뜻)라는간도사투리로 표현할 줄도 알았다.
김성주는 오빈이 보낸 교통원 김춘식과 함께 중국 공산당 연길현위에 도착해서야 오빈에게 자기를 부르도록 시킨 사람이 바로 채수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성주는 이때 처음 오빈과 만났다. 만나고 나서 소개를 받을 때 깜짝 놀랐다. 오빈이 그동안 김성주가 안도에서 김일룡과 함께 대전자의 지주 장홍천의 곡간을 털었던 일들이며 또 차광수가 유하현에서부터 데리고 나온 조선혁명군 대원들 10여 명이 지금 천보산에 왔다는 사실까지도 낱낱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채수항이 또 김춘식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동안 오빈은 김춘식의 집에 처소를 정하고 있었다.
“채 형, 어떻게 오 선생님은 마치 안도에 와 있었던 사람처럼, 내가 안도에서 하고 지낸 일들을 이처럼 낱낱이 알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김성주는 채수항에게 따지고 들었다. 비로소 채수항은 오빈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학섭이가 사실은 줄곧 옹성라자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연길현위원회로 파견되었다네.”
오학섭이란 오빈이 용정 동흥중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사용해왔던 이름이었다.
“아니 그럼 오 선생님이 그동안 줄곧 안도에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오빈은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데 채수항과 김춘식이 번갈아가면서 대신 대답해주었다.
“오 비서는 안도 토박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오.”
김춘식이 이렇게 말했고 이어서 채수항이 오빈의 정황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학섭이는 차조구에서 오래 살았다오. 성주가 조선혁명군에 가 있을 때는 옹성라자에서 툰장 노릇까지 하고 있었을 때였소. 이번에 연길현위원회로 전근하기 전까지 줄곧 옹성라자 당 구위원회 서기로 있었소. 김일룡 동지도 사실은 학섭이의 지도를 받고 있었던 게요. 그동안 성주가 우리 당과 조직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도 게으름 없이 반제반봉건 투쟁을 벌여왔고 또 우리 당이 주장하고 있는 유격대 건설을 위하여 총까지도 마련한 사실을 이해했소. 또한 돌아온 조아범 동무가 동만특위에도 보고했고 또 연화현위원회에도 보고하였댔소.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현위원회의 결정에 의해성주 동무를 왔다 가라고 부른 것이오.”
나중에야 오빈은 김성주를 조양천까지 오게 한 사연에 대해서 말했다. 김일룡으로부터 김성주의 당 조직관계를 회복하자는 보고를 받고 오빈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이 일을 채수항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때 채수항은 중공당 화룡현위원회 제1임 서기였고 안도현위원회가 아직 조직되지 않았던 1931년, 오빈이 서기로 있었던 옹성라자구위원회는 채수항의 영도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채수항과는 용정 동흥중학교에도 함께 다녔고 또 채수항은 오빈의 중국 공산당 입당 소개인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도리대로라면 채수항과 오빈이 함께 김성주의 당원 증명인으로 나서면 아무 문제도 없을 성 싶었으나 이때 생각과는 달리 발목을 잡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성도(金成道)였다. 김성도의 이름은 김성주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을 거쳐 중국 공산당으로 적(籍)을 옮겼던 모든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았다. 김성주는 남만청총 때부터 이 이름을 얻어들었는데 그것은 김성도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 간부의 신분으로 고려공산 청년회 중구의 책임자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 8월에 동만 특위의 파견을 받고 훈춘에 가서 훈춘현위원회를 직접 조직했던 사람도 바로 김성도였다. 그는 당시 동만 특위 조직부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는데 각 지방 당위원회에서 키워내고 있는 당원들에 대한 심사를 아주 엄격하게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 동지가 아니라, 성도 동지가 지금 왕청에 나가있는 군사부장 김명균 동지한테서 성주에 대한 무슨 좋지 않은 말을 얻어들은 것이 있었나보오.”
여기까지 들었을 때 김성주는 속이 덜컹 내려앉았으나 침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원인인지 알 만합니다.”
“성주, 지금 두 가지 문제만 해명되면 성주의 입당 문제는 다 풀 수가 있소.”
“채 형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김성주는 채수항과 오빈에게 하나하나 설명하였다.
“제가 김명균 아저씨한테 고유수에 가서 총을 구해오겠다고 약속하고 폭동 전에 돈화를 떠났댔으나 내가 고유수에서 붙잡혀 이통현 공안국에 갇혔던 것은 이광 형님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제시간에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얼굴빛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채수항과 오빈은 금방 밝아지는 얼굴로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참,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다음, 작년 ‘8ㆍ1 길돈 폭동’을 앞두고 박윤서 아저씨가 직접 와서 조직했던 ‘모아산’ 회의에는  나와 진한장이 모두 열성분자로 불려가서 참가했고 이 회의에서 마천목 아저씨가 직접 우리 두 사람의 당 소개자가 되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저와 진한장은 당기 앞에서 선서까지 했고 마천목 아저씨가 직접 우리 둘을 예비당원으로 인정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김명균 동지가 이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지 않겠소?”
오빈이 묻는 말에 채수항은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번에 성도 동지와 만나면 내가 다시 말씀 드리겠소. 그런데 그래도 만약 길돈(吉敦) 임시지부에서 예비당원으로 인정된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와 학섭이가 다시 성주의 입당소개인으로 나서는 것이 어떻겠소?”
“아무래도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소.”
채수항은 다시 김성주에게 위안의 말을 건넸다.
“성주, 우리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루나 이틀만 하고 그만둘 것이 아니잖소, 한평생, 한목숨을 다 바쳐 하기로 한 일이니 설사 정식 당원으로 인정받는 일이 좀 늦춰지더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다른 생각 같은 것은 갖지 말기 바라오.”
김성주는 길돈 당 임시지부에서 예비당원이 된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채수항의 말에 몹시 기분이 상했으나 채수항과 오빈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위해 입당 소개인이  되어주겠다고 나서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두 분 형께서 이처럼 나서주시는데 제가 다른 생각을 가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럴 때 오빈이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러잖아도 이번에 성주 동무가 마침 잘 왔소. 채수항 동무와 나는 종성지방으로 나갈 일이 있는데 이번 길에 성주 동무도 같이 갑시다. 화룡현위에서 채수항 동무가 직접 책임지고 조선으로 파견한 동지들이 지금 육읍 일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오. 이번에 성주 동무도 우리와 함께 조국의 땅을 밟아봅시다.”
김성주의 얼굴에서는 금방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 이렇게 좋은 소식이 있었군요.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어 채수항과 오빈이 조선 종성지방으로 갈 때 김성주도 따라가게 되었다. 종성은 채수항의 고향이기도 하였고 또 오빈의 가족이 얼마 전에 모두 종성군 신흥촌으로 이사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성으로 들락거렸고 얼마지 나지 않아 종성에서는 ‘종성반제동맹’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의 책임자가 오빈의 아버지 오의선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조선 내 종성에까지 우리 당의 조직이 뻗쳐있단 말씀입니까?”
“학섭이 아버지가 우리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 것이오. 학섭이 아버지의 집이 우리들의 비밀연락처요. 우린 장차 두만강 연안에서 내 조국을 바로 눈앞에 바라보면서 항일투쟁을 벌일 생각이오. 이번 길에 성주를 데리고 가서 종성지방의 우리 당 조직과도 연계를 갖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이렇게 되어 김성주는 당시 중공당 화룡현위원회 제1임 당 서기였던 조선인 채수항과 그의 친구 오빈을 따라 처음으로 조선 종성지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조양천과 개산툰 사이에서는 조개선 경편열차가 개통되어 있었고 그들 일행 셋은 개산툰까지 기차로 도착한 뒤에 석건평까지는 걸어서 갔다. 석건평에는 조선으로 들어가는 나루터가 있었고 여기서 건너가면 바로 조선 동관진에 도착한다. 오빈이 직접 공청원으로 발전시켰던 광명촌청년회 회장 최성훈이 동관진 두량조합의 콩 정선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성주는 이때 채수항과 오빈의 소개로 종성지방에 파견되어 나왔던 중국 공산당 조직 책임자들, 파견원들도 만났고 또 최성훈 등 종성지방의 열성분자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1931년 5월에 있었던 일이었다.


6. 양림과 료여원


이 무렵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는 김성도의 세상이었다. 동만 특위의 관할구역은 1930년 10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동만 특별위원회(동만 특별지부위원회의 전신)가 설립될 때 획정되었는바,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무송, 화전, 액목, 장백 등 10여 개의 현 당 조직들이 모두 동만 특위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동만주 바닥에서 가장 오래 활동하고 또 그 터전을 직접 닦아왔던 사람은 왕경과 박윤서 그리고 한별을 들 수가 있는데 이때 한별은 이미 옥사하고 박윤서도 출당 처분을 받은 뒤 실종된 상태였다. 그런데 후에 남만주에서 오성륜과 만났던 양림은 오성륜에게서 박윤서가 자기를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형님이 동만주에서 억울하게 출당 당하고 나를 찾아왔기에 내가 그의 당적을 회복시켜 주었소.”
오성륜의 말에 양림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아니, 성 위원회 순시원까지 하셨던 분의 당적을 당신이 제멋대로 회복시켜주고 그랬단 말이오?”
양림이 가까스로 한마디 물었더니 오성륜이 대답했다.
“그 형님에 대해서는 주 동무(양림의 별명)가 잘 모르오. 좀 뽐내기 좋아하는 결함은 있지만 얼마나 혁명열정이 끓는 사람이오? 그 형님이 출당당하고 나를 찾아왔던데 얼마나 상심이 컸던지 눈과 코, 귀에서 모두 흰 고름이 줄줄 흐르고 있더구먼. 너무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복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아하던데 내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내가 반석중심현위원회(盤石中心縣委員會) 이름으로 그 형님의 당적을 회복한다고 선포하고 만주성위에도 보고하였소. 그런데 주 동무도 잘 아시다시피 지금 만주성위원회가 온통 뒤죽박죽이오. 서기부터 부장들이 모두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지방에 내려와 있는 우리로서는 지금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오.”
이렇게 한바탕 늘어놓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오성륜과 양림은 친구 간이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서도 함께 교관으로 재직했었는데 오성륜은 새로 부임하여 온 러시아어 교관이었고 양림은 이미 상위계급을 달고 있었던 황포군관학교 집훈처(集訓處) 교관으로 훈련부 기술주임까지 겸하고 있었다.
료여원이 만주성위원회 비서장으로 있을 때 양림은 황포군관학교를 떠나 소련으로 가서 1년간 공부하고는 만주성위원회로 파견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만주의 중국 공산당 내에는 양림만큼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간부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1925년에 벌써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된 사람이었고 당원이 되기 이전에는 바로 이 만주 땅에서 ‘청산리 전투’에까지 참가하였던 독립군 출신의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활동할 수 있는 명분도 있었다.
당시 만주성위원회 안에서는 능히 그의 혁명경력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이 남만의 오성륜과 북만의 김지강(金志剛, 崔鏞健)밖에 없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또 모두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했었고 각자 비슷한 시기에 만주로 파견 받고 나와, 동만주와 남만주 그리고 북만주로 갈라져 나갔다.
물론 동만주로 나왔던 양림의 활동이 가장 눈부셨다. 그것은 동만주의 지리적 위치가 직접적으로 조선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 데다가 중국 공산당의 ‘조선혁명 지원’이라는 방침 아래, 특별히 조선인들이 많이 집중되어 살고 있었던 동만주의 혁명열정이 여느 지역보다도 훨씬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1931년을 전후하여 동만 각지에서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유격대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황포군관학교 교관출신이었던 양림이 중국 공산당 동만 군사위원회 서기로 내려와 활동하였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양림의 황포군관학교 교관시절의 동료, 혹은 제자들이었던 최상동, 방상범, 신춘, 김철산, 장자관 등의 사람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료여원은 중국 관내(關內) 사람으로서 1904년 호남성(湖南省) 안화(安化)에서 태어났는데 조선말도 할 줄 몰랐고 또 동만주의 사정에 대하여서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나이도 양림보다 한참 어려서 직위는 양림보다 높았으면서도 양림을 부를 때는 항상 ‘로우저우’(老周), 또는 ‘주형’(周兄)으로 불렀다. 동만주에 도착하여 거처를 잡을 때도 료여원은 위장용으로 차려놓았던 국자가의 한 약방 곁에다가 양림의 처소를 마련하고 항상 가까이에서 양림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는 양림이 지방 어디로 떠날 때마다 “주형, 언제 돌아오십니까? 빨리 돌아오십시오. 꼭 무사해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당부하고 배웅했고 양림이 돌아오면 너무 반가워 손을 잡고 흔들며 직접 차를 따르고 또 어떤 때는 직접 요리까지 만들어가면서 그를 반겼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료여원은 유격대를 건설하는 일은 모조리 양림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대신 조직부장 왕경과 함께 당 조직 건설을 틀어쥐었는데 동만주에 도착하자마다 제일 먼저 해낸 것이 동만 특위 산하 중국 공산당 훈춘현위원회를 결성해낸 일이었다.


7. 동만 특위와 ‘외눈깔 왕가’


이에 앞서 왕경의 파견을 받고 훈춘으로 갔던 김성도는 혜인(惠仁)과 혜은(惠銀) 두 지방에 중국 공산당 구 위원회를 결성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훈춘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이때 료여원과 만난 김성도는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만난 것처럼 료여원을 따랐고 료여원의 지시라면 그것이 옳건 틀리건 상관없이 무조건 집행하였으며 일이 잘 풀려 성과가 나오면 그것은 료여원의 몫으로, 잘 풀리지 않아 과오가 생기면 다 자기의 책임으로 돌렸다.
항상 씩씩하고 또 성격도 불같이 급했던 김성도는 ‘5ㆍ30 폭동’ 때 시위 대오와 함께 돌진하다가 자기편 농민이 휘두르는 작대기에 잘못 얻어맞고 눈을 상한 것이 그만 한쪽 눈이 실명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일설에는 한 시골 한의사가 그의 눈을 이식해준다며 자기 집의 황둥개를 묶어놓고 산채로 개의 눈을 뽑아서 김성도의 실명된 눈구멍 안에 넣어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실명된 그의 한쪽 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피고름이 흘렀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구루메가네’(선글라스의 간도사투리)라고 부르는 검은색 안경을 항상 끼고 다녔는데 동만 사람들에게 ‘외눈깔왕개’ 또는 ‘개눈깔왕개’로 불리기도 했다. 료여원은 인터뷰 때 김성도가 끼고다녔던 안경은 자기가 봉천에 회의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 사주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도에 대한 료여원의 신임이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훈춘에서 활동할 때 김성도는 왕개(王盖)라는 중국이름을 사용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 이름 때문에 비롯된 별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료여원이 적극적으로 김성도를 발탁하였기 때문에 료여원이 동만 특위를 떠나 만주성위원회로 돌아갈 때 김성도는 어느덧 연화현위원회 서기와 연길현위원회 서기를 거쳐 동만 특위 조직부장까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이때 김성도에 비해 나이도 많고 또 능력이 있었던 다른 특위 위원들, 예를 들면 중국인 위원 유지원(劉志遠)이나 이용(李鏞), 이창일(李昌一) 같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고 또 왕경까지 남만으로 전근이 되었다보니, 아직 새로운 특위서기가 도착하지 않았던 동만주에서 김성도는 중국 공산당 내의 제일 높은 간부나 다를 바 없었다.
김성도는 누구에게 보고할 것도 없이 자기 멋대로 동만 각지 현위원회에 서기와 현위원회 산하의 부장들까지도 일일이 직접 임명하여 내려 보내곤 하였다. 김명균이 연길현위원회 군사부장에서 왕청현위원회 군사부장으로 전근되었던 것이 그때 일이고 이용국이 동만 특위 공청단 서기로 임명되었던 것도 그때의 일이다. 특히 이용국은 김성도의 밑에서 오랫동안 공청단 사업을 책임졌던 사람이었다. 이용국은 1930년 6월에 중공당에 입당하고 8월에 연화중심현위원회 건립에도 직접 참가하여 청년부장과 공천단 서기가 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이하 생략-


새터민
  - 2017/04/09 09:31:16
이북에서 공부하였던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보다 열배 백배 다 자세합니다.
박상철   - 2017/04/09 10:26:06  
소사하까지 왔을 때 김성주가 박훈(朴訓)이라고 부르는 괴한 하나를 데리고 김일룡의 아내를 데리고 대사하로 오고 있었던 경찰들을 습격했다. 김일룡의 아내를 압송하여 오던 경찰 셋 가운데 둘이 박훈의 권총에 맞아죽고 돌아서서 내뛰고 있었던 경찰을 김성주가 쏘았으나 경찰이 넘어지기는 커넝 오히려 총소리를 듣고 놀란 김일룡의 아내가 땅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동무, 동무가 사람을 잘못 쏜 것 같소.”
중국 남방에서 나온 박훈은 중국 공산당 연길현위원회 비서 오빈(吴彬)으로부터 김성주를 소개받고 안도로 올 때 김성주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소개받았던 탓에 만나서부터 계속 ‘김일성’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김성주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김성주는 장홍천에게서 빼앗은 권총이 진짜 독일제 권총이 아니고 복제품이라고 불평했다.
“이 ‘싸창’이 죽어라고 명중이 잘 안됩니다.”
“총신이 문제 있다고 해도 요령을 장악하면 명중이 되는 법인데 뭔 타령인가.”
박훈은 김성주의 권총을 가져다가 손에 들고 몇 번 가늠해보더니, 바로 도망쳐가고 있었던 경찰에게 단방에 명중시켰다.
“그나저나 빨리 저 아주머니한테 가보오.”
박훈은 뛰어가서 경찰들의 총을 걷어왔고 김성주는 김일룡의 아내를 둘러업고 달려왔다.
“박형, 이 아주머니가 총소리를 듣고 기절한 것 같습니다.”
“빨리 피하기오.”
김성주는 박훈과 함께 김일룡의 아내를 둘러업고 소사하로 갔다.
뒤늦게 달려온 김일룡은 자기의 아내가 오랜 지병을 앓아오고 있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더구나 김일룡의 아내는 올해 접어들면서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졸도하여 쓰러졌는데 한 번 쓰러지면 하루나 이틀 동안씩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때 졸도한 김일룡의 아내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였다.
박상철   - 2017/04/09 10:28:11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유순호선생님의 이 ?김일성평전?은 참으로
남북한 어느 한쪽으로도 편향하지 않고
순수 제3자의 시각에서 쓴 인물평전이라는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새내기 혁명가 김일성 즉 김성주의 유격대 초창기의 모습이
참으로 리얼하게 안겨옵니다.

연변독자   - 2017/04/09 10:32:33  
그러니깐 정답은 반일적위대였군요
김유진
  - 2017/04/10 23:41:33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바르게 쓴 역사의 진실을 잘 읽었습니다.
거침없이 진실을 파헤친 "김일성 평전"! 읽을 수록 대단하고 흥미진진합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썼다는, 그것도 김일성이 쓴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시켜
억지를 부려 만들어낸 "김일성 회고록"을 사실처럼 읽으며 환히에 찼던 순간들에
검은 구름이 덮였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은 더할나위없이 무덤으로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순호 선생님이 쓴 "김일성 평전"이 남북역사에,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도 그 빛을
유난히 발할것입니다.
????   - 2017/04/14 08:47:27  
이것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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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얻어들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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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민족 항일투쟁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대학에서 전공하고 있는 분야도 력사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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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를 마라..   
No : 436 Date : 2007/05/07 Hit : 6195 Vote : 225 Name :  낙화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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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 435 Date : 2015/02/17 Hit : 6655 Vote : 220 Name :  피안
   또 새해가 시작되어 나의 인생은 다시 요란스러워지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활기에 넘치려고 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음일가?  

   작년에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던 일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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